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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해방공간에서 소련은 한반도를 자신들이 원하는 친소국가, 공산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미국은 지난 3년간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과 협력하여 한반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은 미국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교묘히 자신들의 계획대로 한반도에 공산국가를 세우고자 하였다. 미국은 소련과의 회의를 통한 진척이 없자 이 안건을 유엔으로 가져가고자 하였다. 국내에서도 소련에 더는 양보를 해서는 안 되며 유엔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반도의 문제는 유엔총회로 이관되었다.소련은 이를 강력하게
한국 근대사의 조명
부천신문
2021.07.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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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19년 3·1절 온 민족이 일어나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씨앗을 뿌렸다. 이렇게 1919년 3·1절에 씨가 뿌려진 씨가 마침내 1948년에 그 싹이 틔웠다. 이 싹은 쉽게 얻어진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 땅에는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는 민주주의 세력이 있었고, 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다. 민주주의 세력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모태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임정법통론이 김구를 중심으로 있었고, 공산주의 세력에는 “인민혁명을 통해 인민공화국을 건술해야 한다”라는 박헌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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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7.0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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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47년 초 남한의 정치지형은 하지를 중심으로 하는 미군정 세력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민족주의 세력의 양 강 구도로 정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핵심 주제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문제였고 이것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논쟁에서 미군정은 미 국무성의 입장을 받아들여 소련과 함께 한반도의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민족세력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였고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운 후 소련과 협상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남한의 대부분 사람은 이승만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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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6.2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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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해방공간에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좌파학자들은 많은 국민이 공산당을 지지했음에도 미국이 남한에 들어와 국민의 뜻과는 다르게 민주주의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이 국민의 뜻대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미국이 미국의 뜻에 따라 만든 정통성이 없는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의 뜻대로 만들어진 나라일까? 혹은 미국이 강제로 만든 민주주의 나라일까? 해방 직후, 좌익이 우세하였다.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전쟁을 선포하고 함경북도에 도착하였다. 소련군이 함경북도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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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6.0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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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1946년 3월 1일까지는 3·1운동에 관하여 어떠한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3·1절이 가까워지면 일본 경찰이 1919년 3·1운동 때와 같은 대대적인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조사를 하였다. 심지어 3·1절을 일본 천황을 섬기는 날로 만들어 한국인들이 일본 신사에서 참배하도록 강제하였다.해방 후, 최초의 3·1절 기념행사를 1946년 3월 1일에 열 수 있게 되자 김구는 비상정치회의 창립하였고 이승만의 독촉중앙협의회와 연합하여 1946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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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6.0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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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우리나라를 어떤 나라로 건설할 것인가? 라는 큰 과제가 남아 있었다. 민주공화국으로 건설할 것인지 혹은 인민공화국으로 건설할 것인지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 중 민주공화국을 만들고자 하는 3개의 중요한 세력이 있었다. 첫 번째는 미국, 두 번째는 우익 지도자들(이승만, 김구, 김규식) 그리고 이들을 지지한 기독교 세력이다.해방 직후, 국내에는 여운형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 좌익이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 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무렵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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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5.2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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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이 38선을 기점으로 민간인들의 남북교류를 막기 시작하면서 38선이 경계선이 되었다. 이로 인해 남한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자 미국은 하나의 통일된 정부를 만들고자 소련에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무응답으로 일관하였고 이에 미 국무성은 38선 문제를 1945년 12월 모스크바 외상회의에 제기하였다.종전 직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4대국의 공동신탁통치를 통해 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38선을 경계로 왕래가 막혀 남한에 석탄 문제, 전기 문제, 교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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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5.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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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의 날이자 분단의 날이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이내 38선이 왜 나누어졌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큰 질문이 남겨져 있었다. 누가 분단의 주역이며 누가 갈라놓았는가?38선은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제안하였고 이를 소련이 수용한 것이다. 즉, 38선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 작전선이다. 하지만, 소련은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의 목적뿐만 아니라 남한 사람이 북한으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정치적 경계선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미국 국무성은 한반도는 하나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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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5.04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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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1945년 8월 15일, 36년간 이루어졌던 일제 강점기에서 마침내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이 기쁨은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이내 누가, 어떻게, 어떤 건국을 시행할지를 두고 다툼이 생겼다. 건국에 대한 두 가지 방향이 나타났다.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건국의 주체가 공산 세력, 지하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 건국준비위원회를 형성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국민을 대표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세워졌으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함을 주장하였다.일본이 전쟁에서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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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4.2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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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설되었을까? 대한민국 건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미국이다. 따라서 해방 전후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어떤 정책을 가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1945년 8월 하순 미 국무성은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통해 중앙 미군사령관 하지에게 명령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민간행정업무가 일본군의 항복이 종료된 후에 현실적이 되며, 그때까지는 민간행정업무는 통합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한국이 하나의 중앙집권화된 행정구역을 만들어야 한다.” 즉,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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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4.1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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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대한민국의 해방은 일본으로부터 거저 이뤄진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많은 사람들의 숨겨진 노력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 이승만 박사이다. 당시 일본은 독일과 더불어서 세계적으로 강대한 국가였다. 부강한 일본을 대한민국이 힘으로 물리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일본을 물리쳐야 할까? 그 답은 미국밖에 없었다.독립운동의 핵심은 미국을 움직여서 대한민국이 미국과 더불어 일본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국제정세를 이해하였던 이승만 박사는 미국과의 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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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4.0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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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대한민국”은 “대한”이라는 단어와 “민국”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대한”은 민족 공동체를 의미하고 “민국”은 민주공화국의 정치를 뜻한다. 한민족(韓民族)에게는 여러 나라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고조선, 삼국, 고구려, 조선 같은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은 임금이 주인인 나라였다. 우리는 이것을 군주국가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역사에 없던 나라로 나타났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한반도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나라였다. 민주국가라는 것은 서양에서 나온 개념이다. 한민족(韓民族)에게 새로운 정치사상이 들어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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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신문
2021.03.24 1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