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⑦> 부천시의회 김관수 기획재정위원장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후 매일 의회에서 전반기 속기록 보는 것이 일이라는 김관수 의원. 깐깐하고 꼼꼼한 성격 탓에 자신을 싫어하는 공무원들이 많을 거라며 웃어보이던 부천시의회 김관수 기획재정위원장을 만나봤다.


 


시의원에 당선되기 전,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 나이 14살이 되었을 때 서울에 있는 가구공장에서 공예가구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일하던 작업대 위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서 연탄불을 켜놓고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습니다.


가구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가 손가락 8개를 다쳤습니다. 접합수술을 했지만 끝내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공장에서 항상 밥을 먹던 식당이 있었는데 그 집 딸이 저에게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일만 해가지고는 살 수 없다’면서 항상 공부를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분 때문에 야간 전수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시험기간에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한다고 공장 사모님께 많이 혼나, 담요로 창문을 다 덮어 불빛이 새어나가는 걸 막아가며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를 보고 방송통신대 경제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단국대학교 행정법무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지금은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박사 3학기 과정에 다니고 있습니다.


성당을 다니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진, 슬아, 빛나리, 슬기 막내 상윤이까지 다섯 아이를 얻었습니다.


부천에는 85년도에 왔습니다. 부천과 인연이 된 사연이 참 재미있는데, 아이들 엄마와 어려운 시절 매번 이사를 다닐 때마다 처량하게 비가 내리는 겁니다. 단 두세 평이라도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지하철을 타고 집을 보러 다니던 중에 배가 너무 아파서 ‘화장실 좀 들렀다 가야되겠다’ 하고 내린 곳이 부천이었습니다.


성곡동에서 가구공장을 조그마하게 차려 일을 하다가 87년에 물난리가 나서 다 쓸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실내인테리어 일을 하게 됐고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경기도에서 해외투자 허가를 받아 중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80여 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제정구 의원의 동생인 제정원 신부님께서 1993년도에 원혜영 의원을 도와서 일을 해보라고 권유하셔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혜영 의원님이 꼬마민주당에 계셨을 때 저 또한 새정치국민회의로 가지 않고 꼬마민주당에서 함께 했었습니다. 98년도에 두 당이 합당이 되고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내천을 주지 않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두 표 차이로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떨어진 이후에 성당 활동도 더 많이 하고 나름대로 희생도 했고 정말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도에 민주당으로 내천을 받아 상대후보와 큰 표 차이로 당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던 때는 95년도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다보니 지방자치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정치인으로서 큰 틀에서 봉사적 개념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제정원 신부님께서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왜 부천시의원이 되려고 하는지 자신을 설득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충분한 답을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왜 시의원이 되고 싶은지 깨달았을 때 출마해도 늦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98년도 출마를 결심하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 고향은 전라도고 아내의 고향은 경상도입니다. 부천인구가 당시 65만이었는데 각기 다른 고향에서 다르게 살아가다가 부천에 모여 살거나 우리 자식들처럼 부천에서 태어나 살아가게 됩니다. ‘내 고향 부천’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으려면 기성세대가 뭘 해줄 수 있겠는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의정활동을 통해서 정책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천에 도움을 주는 의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의정활동 중 가장 큰 성과는.


2002년에 시의원이 돼서 부천시에서 자료를 받아보니 각종 용역비로 나간 돈이 약 130억원이나 됐습니다.


사실 2,000만원 이하의 일들은 굳이 용역을 주지 않아도 공무원들이 다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일입니다.


그래서 2003년도에 의원발의로 ‘용역과제심의위원회운영조례’를 만들었습니다. 해당 조례는 2,000만원 이상의 용역비를 편성하려면 반드시 위원회에서 심의를 받고 난 후 예산을 편성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후 1차 용역과제심의위원회에 들어가 심의를 하면서 ‘의원의 활동은 이런 것이다’하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전 같으면 각 과에서 마구 예산을 올렸겠지만 비슷한 용역은 스스로 걸러지고 자진 철회하는 등 용역비가 130억에서 100억으로, 그 후 70억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인생이나 정치생활에 있어서 의원님의 멘토는.


저에게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멘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내입니다. 저에 대한 비판도 가장 강하게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계신 모든 지인들이 저의 멘토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대화를 통해서 제가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가끔 ‘조금만 부드러워져라’하는 말씀을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인생이나 정치에서 큰 힘이 되어주시는 분들은 신부님입니다. 신부님들은 정치적으로 감각이 뛰어나시고 어려운 순간에 큰 힘이 되어주십니다.


 


요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는 의정활동 분야와 앞으로의 계획은.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에 관련해서 행정사무감사 때나 내년 업무보고, 예산심의 때 반영하기 위해 여러 가지 관계 자료를 수집해서 점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날마다 의회에 나와서 하는 일이 전반기 속기록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부천시 산하기관에 대한 경영방법에 대한 내용을 전반적으로 깊이 있는 점검을 해보고 있습니다. 산업진흥재단, 만화정보센터, 부천문화재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 사업집행과정이나 경영에 대해서 정말 시민의 세금을 자신의 돈처럼 생각하고 집행했는지 호주머니 푼돈처럼 가볍게 집행했는지를 세밀하게 볼 계획입니다.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는 절차가 잘못된 부분이 있지만 의회에서 심의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개최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은 예산을 집행하고 사업을 하는데 있어 일꾼적 행정마인드를 가지고 엑스포를 진행해야 된다는 겁니다. 일을 찾아서 해야지 시키는대로만 해서는 절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엑스포와 같이 공공성에 대한 가치적 행사는 가장 먼저 시의 집행의지, 시민의 대화합, 미래적 가치의 적립 세 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천시는 집행부의 의지만 있을 뿐 시민의 화합도 미래적 가치 적립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요즘 지역경제가 엉망입니다. 사실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영화도 보고 문화도 즐길 수 있는 겁니다.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부천시는 미쳤다. 일주일마다 저렇게 행사를 하느냐”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쓰는 비용을 일거리 창출이나 먹고사는데 쏟아줬으면 좋겠다”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문화도 중요하지만 말 그대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서민들에겐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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