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⑨> 부천시의회 김영회 의원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푸근함, 어딘지 모르게 소박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심장과 심장은 가까워야 뜨거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김영회 의원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꼭꼭 숨겨왔던 마음속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내들었다.



"운동밖에 모르던 나, 어느 날 성곡동의 별이 되다"



서울에서 지내다가 소를 키우는 친구들을 보고 "나도 시골에 내려가 목장이나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형님께서 부천에 가게를 하나 얻어놨으니까 일을 해보라고 하셔서 광고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88년도에 오정구와 인연이 됐고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조기축구회에 나가 활동하면서 "원종축구회"를 결성했습니다. 어린 나인데도 믿음이 갔는지 일찍이 조기축구회 총무를 맡아 7년 동안 일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14년간을 매일 아침 공을 들고 운동장에 나갔습니다.



38살에 조기축구회장을 맡게 되고 오정구연합회 초대 총무에서 사무국장, 부회장까지 맡아서 일했습니다. 제가 시의회로 안 왔다면 "오정구축구연합회 회장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웃음)



그리고 당시 이충선 운영위원장이 부천시 자유총연맹지부장을 맡아서 했었는데, 성곡동 자유총연맹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하셔서 조기축구회 회원을 포함한 18명 정도를 시작으로 출범식을 갖고 위원장을 맡아 일했습니다.



젊은 사람들로 구성이 돼서인지 부천시 동 체육대회가 열리면 성곡동에서 상은 죄다 쓸어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게 성곡동 뜨는 별이 된 겁니다.(웃음)



"어르신들 외로움 달래드리는 친구 되고 싶어"



성곡동 자유총연맹 위원장을 하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에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시작했습니다. 첫 해에 400여명의 어르신들이 오셔서 성공적으로 경로잔치를 치르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움직이는 자원봉사대"를 결성해서 제일 처음 한 것이 홀로 지내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봉사였고 이후에 점심도 함께 제공하게 됐습니다. 미용실도 모시고 가고, 생일 맞으신 분들에겐 작은 정성을 모아 조그마한 선물도 전달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봄·가을엔 야외로 소풍도 가고 여름에서 가을을 지날 땐 효도관광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연말에는 노래방에 모시고 가기도 했는데, 사실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흥이 나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시는 겁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어르신들이 진짜 바라는 것은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을... 외로운 어르신들에게 미약하나마 친구가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깊은 상처, 하지만 이겨낼 것"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원혜영 의원님 캠프에서 성곡동협의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게 됐습니다. 정치에 "정"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거의 한 달을 고민했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겪고 결정을 내렸지만, 이후에 들리는 안 좋은 이야기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정치라는 것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던 겁니다. 그동안 열심히 봉사했던 것도 하루아침에 "저 짓을 하려고 그랬구나"하고 말하던 사람들 때문에 슬펐습니다.



하지만 귀를 막고 여러 인맥을 동원해서 부지런히 활동했고 결국 경선 없이 1순위로 공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천을 받기 전에 너무 외부에서만 활동을 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부족해서일 테지요. 아이들 엄마와 헤어지고 지금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처지만,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집에서 반대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내는 혼자 많이 외로웠는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보 같이 그걸 모르고 활동하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잘 나가던 사업까지 부도가 나더니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스스로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교회를 찾았는데, 그곳 목사님께서 정말 원하는 일을 하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자신이 도와줄 테니 용기를 내서 도전해보라고...



이런 일들을 겪고 선거를 치르는 동안 많은 후보들이 인신공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이 깨진 상태다 보니, "가정도 못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느냐"는 안 좋은 시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에게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5시에 집을 나와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고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흑인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얼굴이 새카맣게 탔습니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고를 떠나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했고, 당선이 됐습니다.



하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당선이 되어도 기쁘지 않았고 어딜 가도 뜨거운 눈물만 흘렀습니다. 당선증을 받으러 갈 때도 혼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에게 꽃다발도 받고 축하인사를 받는데 말입니다.



그때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더 큰 일에 나를 쓰시려고 하나님이 아픔을 주셨나보다"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후에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려고 차도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몇몇 분은 아시겠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 없다고 해서 불편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편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 간의 관계, 믿음, 신뢰"



심장과 심장은 가까워야 뜨거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밀착해야 된다는 것이죠. 시 집행부의 책임 있는 사람일수록, 한 달에 한 번이라도 현장에 나가 사소한 일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행정사무감사 때도 얘기를 했지만 아직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어르신들과 상담할 때 보청기가 없어 목소리가 커지는 경우가 많고 서류 작성할 때 필수적인 돋보기조자 갖춰져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것들은 조금만 예산을 투입해도 현실적으로 크게 와 닿는 일들입니다.



일상복을 입고 관공서나 보건소 등에 가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명함을 내밀면 확 바뀌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틀려집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지위고하를 떠나 민원인이 오면 똑같이 행동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사람 간의 관계, 믿음,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를 위하고,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가 가지려고 하는 마음보다 가지고 싶은 만큼 주고자 한다면 세상은 더욱 환해질 겁니다.



"이젠 목소리를 내야할 때..."


오정대공원 예산이 다 삭감될 분위기였지만 강력하게 주장해서 통과가 됐고 정말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오정구에서는 체육대회를 하려고 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어 원미구에 와서 행사를 진행했었는데, 이르면 내년부터는 오정구에서 행사를 할 수 있게 될 거란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생각입니다. 지켜야 할 것은 꼭 지켜내고, 해야 할 말을 꼭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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