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⑭> 새마을장학회 공영희 회장


부천을 진정 사랑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새마을장학회 공영희 회장. 그가 오랫동안 꾸려온 새마을장학회도 언젠가는 올바른 사람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겠냐며 웃어 보인다.



부천과의 인연은.



1951년 1.4후퇴 때, 당시 17살이었는데 단신으로 월남을 해서 밥도 굶고 갖은 고생을 했다. 처음엔 인천에서 1년, 충청도에서 1년여 정도 있다가 부천까지 오게 됐다.



그때 심곡2동에 정착하면서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쭈욱 살고 있다. 당시에 옆에 개울이 흐르고 주변이 온통 논밭, 복숭아밭이었다. 부천은 부락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시골이었다.



벽돌을 만드는 공장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봉사를 시작했다. 가까운 노인정에 막걸리 사다놓고 어르신들이랑 잔치도 하고 직접 조찬을 만들어 가기도 했다. 운동복도 하나씩 사드리고 아침 일찍 동네 청소도 같이 하면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실향민이다 보니까 외로움도 많이 탔었다. 그래서 "오도민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는데 그때 동마다 지역 주민들한테 추천을 받아서 쌀 한 가마니씩 나눠주기도 했다. 추석, 설 명절 때도 이웃들과 나누는 일을 많이 했었다.



그땐 봉사라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저 좋아서 했던 일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돈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벽돌 사업이 잘 돼서 엄청 쓰고 다녔다.(웃음)



그리고 당시에 조기운동이라고 해봐야 축구가 다였는데, 초대 부천시 조기축구회 멤버였고 북부조기회, 심곡조기회 등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새마을 조기축구연합회 회장, 부천시 축구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라이온스 활동하면서 무의촌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진들과 함께 무료진료 봉사를 했었다. 특히 소사초등학교 운동장에 800여명이 모였던 기억이 나는데, 치과·내과·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원을 하나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환자는 물론이고 환자 아닌 주민들도 다 나왔는데, 당시에는 병원도 제대로 못 다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나왔던 것이다. 그때 정말 보람 있었다.



없어도 없는 티를 안 내고 그저 내 주머니에 뭐라도 있으면 다 꺼내주고 싶어 하는 성격이라서 더욱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이렇게 나누고 살면서 감사하게도 87년에는 "부천시 시민 문화상"이라는 큰 상을 받고, 이어 92년에는 "새마을훈장 노력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새마을장학회는 어떤 의미인지.



1992년에 주변 후원인들과 함께 7,000만원 기금을 마련해 시작했던 새마을장학회에서 올해 18번째 장학금 전달식을 가지기도 했었다.



장학회 설립 당시에는 은행 이자가 좋아서 36개 동에서 한 사람씩 추천을 받아 적은 돈이지만 매년 장학금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서 중간에 장학금을 전달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더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일일찻집을 개최하기도 했었다.



지금까지 자기 주머니 털어서 장학회를 함께 끌어온 운영위원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내 건강만 허락된다면 아직 못 다한 일들을 다 마무리하고 싶다. 올해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는데 잘 풀리기만 하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고 싶다.



그리고 그동안 새마을장학회를 이끌어온 마음을 끝까지 이어갈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 내 나이가 벌써 일흔 여섯인데 새마을장학회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올바른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대상은 새마을 가족을 대상으로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는데 앞으로 1~2년 더 지켜볼 생각이다.



장학금 받은 학생들에게 연락은 오는지.



사실 그런 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 새마을장학회를 꾸려오면서 운영위원 한사람, 한사람이 더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하지만 학생들은 그만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직접 받으러 오는 걸 꺼려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인사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는 아이들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다.



금액이 적어서 그런가.(웃음) 그동안 장학금을 줬던 아이들이 잘 자랐는지 궁금하기도 한데, 전화나 한번 해줬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힘든 암 투병을 두 번이나 겪었는데 건강은 어떠신지.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옛날 기억도 많이 흐려져 가물가물하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듯이 17살 때 단신월남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외롭고 의지할 데 없이 살다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기틀을 마련했다.



그 돈으로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그러다가 83년도에 시작한 봉사활동 단체에서 사람을 잘못 만나 경제력을 다 잃었던 일이 있었다.



젊은 친구가 사업을 해야 되는데 담보물이 없어 시작을 못한다고 걱정하기에 믿고 도와줬는데 그게 화근이 돼서 그만... 내 명의도 빌려주고 수표도 빌려줬는데 욕심을 부리다가 그냥 한 입에 다 털어 넣고 미국으로 도망을 가버리는 일이 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벌였던 모든 일들이 내 명의로 되어 있어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고, 당시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들로 인해서 시간이 지연되고 그러면서 이자에 이자가 붙어 더욱 힘들어지게 됐다.



당시 있는 재산을 다 정리하다시피 해서 빚을 갚아나갔는데, 매일 밤마다 술로 하루하루를 이겨내다 보니 몸이 망가졌던 모양이다. 어리석게 사람만 믿고 명의 빌려주고 수표 빌려준 죄로 엄청난 고생을 했었다. 그게 암 발병의 계기가 된 것 같다.



어쨌든 깨끗하게 다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고 91년도에는 경기도의회 의원에 당선돼서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활발하게 활동을 했지만 위암에 걸린 것을 알고 92년도에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엔 비인강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걱정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랬는지 현재는 큰 이상 없이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떨어진 체력만 관리 잘 하면 된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예전에는 축구도 좋아하고 골프도 좋아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고 건강상 문제 때문에 운동을 쉬고 있다. 하지만 매일 아파트 주변 산책로를 30분씩 걷는다.



마지막으로 하시고픈 말씀은.



내가 지금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부천을 지켜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 지역에 있는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 못마땅한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천을 지켜온 사람, 부천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곳이 발전해야 되는데 때 없이 나타나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든 행정이든 부천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런 사람들을 알아봐야 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도 알아야 한다. 진정 부천을 사랑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젊었을 때 알고 지내던 분들이 오랜만에 만나면 내 건강을 걱정하며 매달려 우시는 분들도 있다. 나이를 먹으니까 이제야 편하게 만나서 얘기도 하고 밥도 먹는다면서...



젊었을 땐 라이벌도 있었고 나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모두 고마운 분들이다.



우리 아들도 하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10년간 고생하다가 2년 전부터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리도 잡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서 보너스도 타고 지금은 용돈도 주는 아들이 자랑스럽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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