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⑮> 남사당 부천도당예술단 남기문 대표


‘사물놀이 탄생 30주년 기념공연’ 인생의 전환점
부천엑스포, 피눈물 흘려가며 만들어낸 결과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들었고, 부모님과 형님의 영향을 받아 7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사당패 놀이를 시작했다는 남기문 대표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여월동에 위치한 부천전수관 개관 이후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부천엑스포를 ‘피눈물 흘려가며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남사당과의 인연은.



아버지, 어머니, 형님이 모두 남사당놀이를 해오셨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음악으로 소리를 듣고 세상에 나왔고,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7살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바닥에 들어섰고 46년간 한 길만 걸어왔다.



85년도에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서울남사당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생활이 안정됐다. 그 이전에 고생한 건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92년도부터 여름휴가를 이용해 안면도 해변에서 공연과 강습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처음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점점 인원도 늘어나고 무대도 크게 짓게 됐다.



특히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지었던 100평 넓이의 무대는 아직도 가슴을 뛰게 만든다. 물이 빠졌을 때 바다로 들어가 2미터 높이의 무대를 만들었다. 물이 들어오면 무대가 바다에 떠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금전적인 이득보다는 사명감으로 강습을 하고 공연을 했다. 그렇게 안면도의 공연문화를 높였고, 꽃지해수욕장이 개발되는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부천과의 인연은.



내 고향은 안성이다. 하지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고 흘러흘러 부천까지 오게 됐다.



부천에 ‘우리멋’이라는 풍물 동아리와 인연이 돼서 복개천에 있는 연습실에서 혼자 먹고 자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서울남사당, 국립국악원 그리고 부천을 오가면서 가족들과는 일주일에 서너 번 집에 가서 얼굴 보는 게 다일 정도로 일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가족들도 모두 부천으로 이사를 오게 됐고 2000년도부터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천의 대표적인 축제인 ‘복사골예술제’도 눈여겨보게 됐고, ‘나도 제대로 된 공연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록 부천에 연고는 없지만 단체를 만들어서 공연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2002년 ‘도당청소년연희단’을 창단했다. 이윤이 목적이 아닌,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싶었다.



부천시민회관에서 창단공연을 했고 정기공연을 목표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리고 시청 앞 잔디광장에 무대를 만들어 정기공연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예산은 적었지만 멋지게 해보고 싶은 마음에 무대, 조명, 음향을 최고의 수준으로 설치했다. 준비한 공연은 1시간30분 분량이었지만 더 잘하고 싶은 욕심과 뜨거운 관객들의 성원으로 3시간을 미친 듯이 공연을 했던 기억이 난다.



부천시에 뿌리를 내린 만큼 부천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볼거리를 제공해야 된다는 사명감이 앞섰다. 그리고 좀 더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보여주자는 생각에 관현악단까지 만들게 됐다.



부천전수관은 어떤 곳인가.



부천시에서 지난 2006년 2월 여월정수장 건물 2층을 연습장소로 마련해주면서 시작이 됐다. 당시 괜찮은 장소를 물색하느라 부천시 곳곳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처음 이곳 여월정수장 건물을 봤을 땐 빨간 벽돌로 된 담이 쳐져 있어서 마치 교도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에서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우리에게는 최고의 장소였다. 밤새도록 뚱땅거려도 시끄럽다고 민원 넣을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무실, 연습실 등 공사를 할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곳에 살다시피 했었다. 사무실 집기를 구입할 때도 내 돈이 들어가는 게 아깝지 않았다.



이제 진짜 좋은 집이 생겼으니 그만큼의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부천 시민들을 대상으로 강습도 계획하고 지역에 크고 작은 행사를 찾아다니며 공연할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부천에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지원을 해줬다는 이유로 모든 일을 중단하라는 연락이 왔었다. 부천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부천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는 보지 않고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에 대해 능력 없는 전수조교일 뿐이라는 둥, 학생들을 대상으로 천만 원짜리 고액과외를 한다는 둥 별의별 유언비어를 퍼트렸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땐 정말 ‘내가 왜 이런 인신공격을 받아야 되나.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나’ 묻고 싶었다.



우리가 전수관과 운영비를 지원 받았지만 이후에 부천시를 위해서 개런티 한 푼 받지 않고 단원들과 함께 공연을 나가기도 했다.



자매도시인 하얼빈과 베이커스필드시 등에 공연을 갔을 땐, 교민들은 물론이고 현지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다. 우리가 그만큼 열과 성의를 다해서 공연을 했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통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풍물을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은 형편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끔은 내 주머니 털어 밥도 먹이고 차비도 손에 쥐어주면서 그렇게 가르쳤다. 학생들에게 받은 게 있다면 집에서 직접 담근 김치, 고추장, 된장이 다다.



나는 평생 이것을 해왔던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다. 예술인으로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없고, 내 자식에게 떳떳하고 존경 받는 아버지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



지난해 3월 ‘사물놀이 탄생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씨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84년도 LA올림픽 공연 때 형님들과 함께한 이후 첫 호흡이라 손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연습을 했었다.



작고하신 김용배 씨를 대신할 사람으로 나를 추천해주신 형님들과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기념공연을 마치고 숨을 고르는데,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 정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지난주 엑스포 조직위 회의가 있었는데.



엑스포를 준비하면서 10원짜리 하나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고, 공연도 펑크 내지 않으려고 더운 날씨에도 쫓아다니면서 굽실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천세계무형문화유산엑스포 성공만 바랬다.



그런데 엑스포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는 것은 우리더러 놀지 말라는 얘기 아닌가. 이번 회의 때 모여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의논했다.



물론 우리도 잘했다고는 볼 수 없다. 지난해 엑스포는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고 열심히 했지만 소홀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고 석 달을 준비해서 이 정도의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가며 노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지 않다. 호소하고 싶을 뿐이다. 그저 무엇이 진정 부천을 위하는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리서치 결과를 안 믿는다.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미숙한 것도 분명 있었지만 첫 해에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부천, 그리고 상동의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족한 것은 보완해서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다보면 분명 투자한 만큼의 값어치를 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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