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⑰> 전통연 기능보유자 성용부


예로부터 우리는 정월대보름이면 소원을 써서 새해 가정의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고 액운을 물리치는 지신밟기와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한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놀이가 바로 ‘연 날리기’다.



부천전통공예체험관에서 전통연 만들기를 전수하고 있으며 국내 각종 축제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전통연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성용부 선생을 만났다.



▷연은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다섯 살 때부터 연을 좋아했다. 당시 6.25 전이었는데 어른들이 연 날리는 것을 보고 혼자 연을 날리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6.25 때 섬에 있는 외갓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겨울에 동지팥죽을 먹고 정월대보름 큰 대회 때 150여 가구가 사는 동네에서 연을 엄청 많이 날렸다. 거의 집집마다 다 연을 날렸다.



열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연을 만들기 시작해서 연 장사를 했었다. 동네에서 ‘성용부가 만든 연이 최고’라는 소문이 났고 연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들 내 연만 사가지고 갔다.



연을 만들어서 그냥 날리는데 그치지 않고 연 싸움을 많이 했다. 정월대보름에 동편, 중편, 서편으로 나뉘어서 각 편마다 선수가 나와 막걸리 한 말씩을 걸고 연줄 끊기 대회를 했다. 보름날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당시 전쟁 때 나온 탄피를 가지고 따먹기 놀이를 하거나 딱지치기, 팽이치기, 제기차기를 하고 놀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어느 곳이든지 연을 만들어 연싸움을 했다. 시골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연을 만들어주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림과 글은 어디서 배웠나.



고향인 통영에서 아버님이 수산업에 종사를 하셨는데 손재주가 매우 좋은 분이었다. 내가 그 손재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님의 필적도 참 좋으셨는데, 그림과 글도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타고난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내 필기장을 보고 시험을 낼 정도로 필기를 잘 했었던 기억이 난다.



붓글씨도 본격적으로 배운 적이 없지만 계속해서 연에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훈련이 된 것 같다. 다들 잘 쓴다고들 한다.(웃음)



▷부천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였나.



어릴 적에 먹을 것도 없이 힘든 시절을 보냈었다. 당시 섬에서는 반농반어로 농사와 어업을 함께 하면서 생활을 유지했고 한때는 마도로스 생활도 했었다.



그러다가 스물한 살 때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공부하면서 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밤새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잠을 쫓기 위해 운동을 겸하기도 했었다.



스물네 살 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아버님이 계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전철에 2원50전을 할 때였는데 서대문에서 을지로로 가는 전철을 타고 구경을 다니다가 명동에 내렸다.



당시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배워야 됐었는데 ‘양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기술만 배우게 해달라고 겨우 부탁해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고 보통은 10년 이상 돼야 기술자가 된다는데 나는 1년 만에 기술자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은 저녁 시간만 되면 일찍 퇴근하고 갔지만 나는 빨리 배워야 된다는 욕심 때문에 집에도 안 가고 밤을 새서 일을 했었다. 그땐 먹고 살일 때문에 연 만들 생각도 못했었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철거를 당해 동생이 있는 부천으로 오게 됐다. 부천이 시로 승격되기도 전이었는데 체육관을 시작하면서 다시 아이들에게 연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땐 온통 복숭아밭이어서 연날리기도 참 좋았다.



▷ 전통연에만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라디오에서 소식을 듣고 연날리기 대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시골에선 무명실에 부레풀을 발라 연줄을 만들곤 했지만 부천에서는 그럴 수 없어 나일론실에 본드를 발라 유리를 빻아 붙여 만들었다.



하지만 몇 회를 출전해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짐을 싸서 돌아오기 일쑤였다. 1년에 한 번씩 10년을 그렇게 대회에 나갔다가 돌아오면서부터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대회에 출전한 사람들이 명주실을 쓴다고 해서 명주실을 사다가 직접 밥풀을 먹이고 유리를 빻아서 붙이고 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만들어진 걸 사다가 쓰는 거였다.



그렇게 싸움꾼으로 살았다. 연을 띄워 치고, 받고, 뒹굴고...



1995년도에 수원에서 문화원장배 정월대보름 전국 연날리기 대회가 있었다. 거기서 연싸움을 해서 장려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받을 정도였다.



스텝과 얼레를 감는 속도가 평소 운동을 해둔 덕택에 다른 사람보다 빠르고 힘이 있는 편이다. 연싸움을 할 땐 수학의 내각과 외각 알아야 되며, 과학적으로 연과 지면이 이르는 각도에 따라 힘의 법칙을 이용해야 하며 연싸움은 평형감각과 균형감각이 필요하며 심리적인 요소로 공격과 수비 전환을 잘 해야 이길 수 있다.



그러다 2000년도쯤이었나, 연을 날리고 있는데 부천공예체험관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었다. 밖에서 연 날리고, 연싸움 하면서 지내다가 하루 종일 공예체험관에서 있으려니 몸도 마음도 맞지 않아 뛰쳐나가기도 했었다.



어느 날은 외손자가 연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피카추연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그것을 계기로 피카추 줄연을 만들어 중앙공원에서 매일같이 날렸다. 그랬더니 엄마 손 잡고 공원에 나온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때부터 ‘아...내가 부천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시민들이 연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라도 광주에 가서도 피카추 줄연으로 1등을 했다. 처음엔 심사위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아이들이 멀리서 보기만 해도 뭔지 알고 몰려들었다.



지난해 부천무형문화엑스포에서 선보였던 선녀연도 호응이 좋았다.



▷ 외국에서도 연을 많이 날리나.



부천의 자매도시인 러시아 하바로브스키시는 매년 연 날리기 국제대회를 연다. 한국대표로 나가서 대상도 받았고, 지난해엔 일본과 공동우승을 했었다. 태국도 2년마다 국제대회를 여는데 직접 줄연을 가져가서 참가하기도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온 세계가 연을 다 날린다. 중국 연은 무당벌레, 딱정벌레, 고래, 독수리 등 모양과 색깔이 가지각색이다. 연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보다 700년이나 앞서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운데 구멍이 없는 방패연은 일본 연이다. 우리나라 연은 구멍이 있는 ‘지연(紙鳶)’이다. 삼국시대에는 ‘풍연(風鳶)’, 조선조 후기에는 지연이라고 나타나있다.



▷ 요즘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어떤가.



아이들 교과서에도 연 만들기가 소개되어 있다는데 선생님들도 연을 못 배웠으니 제대로 된 연을 만들 수 있겠는가. 사실 현장학습이나 체험도 모두 현대 쪽으로 눈을 돌리기 일쑤고 전통은 멀리하고 있어 안타깝다.



오정구청에서 매년 정월대보름 아이들과 연을 만들어 날리고 있는데, 더 많은 아이들에게 연 만드는 법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 바람이 있다면.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으로 당선되기도 했고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누구보다 전통연에 있어서는 ‘성용부가 최고’라는 마음으로 살고 싶고 무엇보다도 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리고 흥미를 일깨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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