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칼럼]

진도 앞 바다에 어두움이 드리워져있다. 꽃 같은 생명이 그 어두움에 갇혀 있다. 생명은 빛이다. 빛이 어두움에 갇히게 된 것이다. 바다가 노여운지 더욱 파도는 높아지고 있다. 생명을 삼킨 어두운 세력을 향하여 진노하듯 넘실거리고 있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슴마다 마음마다 피 멍이 들어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부르지 아니할 수 없어 자꾸만 불러본다. “내 아들아”, “내 딸아”. 그러나 어두움이 청아한 대답도 삼켜 버렸다. 언제 이 어두움이 걷힐까? 수습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 바다는 더욱 검푸르게 멈춘 모습으로 우리의 눈에 비칠 것이다.


산다는 것과 죽는 다는 것의 인생은 누구나 겪는 법이다. 어쩌면 일찍 세상을 떠나 자기의 업보를 피하고, 더 좋은 생명으로 환생하였을 것이라 하더라도 위로 받는 부모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피붙이기에 위로 받을래야 위로 받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앞에 다가와 우뚝 서서 환히 웃을 것만 같은 상상은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반석에 아로새긴 그리움이다. ‘저 바다는 언제부터 저렇게 매정하게 흐르고 있었는가? 저 바다의 물살은 언제부터 저렇게 세차게 출렁이는가?’ 마치 바다는 악마가 벌린 입 같이 흉흉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내가 치마를 덮어쓰고 파도가 일렁이는 저 바다에 뛰어들어, 내 자식, 내 새끼를 꺼내어 위로 올라 올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무슨 짓을 못하랴.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려면 무엇이든지 다 한다. 그러나 여기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이 땅에는 어두움이 깔리고, 아침햇살이 열리고, 아침 태양이이라도 저녁 땅거미가 삼키는 반복과 반복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자고 생명은 어두움과 빛의 번갈아 포개는 포갬에서 자유 할 수 없을까? 어두움이 오고 밝음이 가고, 밝음이 가고 어두움이 와 이렇게 정복자가 뒤바뀌기는 세대 속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필히 어두움 뒤에는 밝은 태양이 떠오르리라. 그대 바닷속 깊이 어두움에 파묻혀 있다고 하더라도 아침이 온다. 영혼에 아침이 밝아온다. 어두움이 밝음을 이기지 못한다. 항상 밝은 아침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다.


지금 메울 수 없는 허전한 전부를 상실한 듯 절망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엔 뜨거운 화산을 내뿜을 만한 사랑이 있다. 멀리 떠나간 사랑을 망각의 그물이 덮어 준 것이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 말자. 흐르고 흐르는 대로 그냥두자. 눈물 속에 아픔이 녹아져 내려 위로와 평안이 이끼처럼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두움이 밝음을 이긴 일이 없다. 어두움은 밝은 아침에 필히 삼키운다.

 

윤대영 목사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