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미국의 KFC 어느 매장에 얼굴을 개에게 물린 어린이가 들어오는 것을 못 들어  오게 막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항의를 하였다. KFC는 정중히 사과를 하고, 이 어린이를 위해서 모금도 하고, 일부의 재정을 출연하여 어린이의 얼굴을 수술해 주었다는 보도를 한국의 유명한 TV 공영 뉴스 채널이 방송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 진의를 알아보려고 추적을 해 본 결과 전혀 사실 무근을 보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TV방송은 전혀 무반응이다.


특히 각 TV 방송에서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산 제품을 분석하여 이를 공개 방송하는 프로그램 역시 사실 무근의 방송을 하여 기업이 문을 닫고, 기업주는 일생을 망친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어느 날 모 공영방송이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다. 약 5시간을 질의응답을 하였다. 그러나 5시간 동안의 인터뷰는 온데간데없고, 전혀 사실무근의 폭로성 방송을 하고 인격을 매장한 후 말이 없다. 검찰에서 무혐의 된 수사결과를 가지고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출을 하였고, 언론중재위원회는 검찰의 처분결과는 사실이므로 정정보도를 권고하였으나, 상대측은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방송을 하였으므로 우리는 사과할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 하였다.

 

경찰마저 동일하다. 이 허무맹랑한 보도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대상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아예 압수수색한 수많은 사람들의 은행계좌를 수색하고 주변사람들의 금융정보 및 공식법인의 일계장를 고소인에게 넘겨주어 고소인은 전문회계법인에게 맡겨 6만 4천여건을 뒤지고 3천여건의 허위범죄 일람표를 만든 것을 경찰이 수사한 것처럼 꾸민 의혹도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믿을 사람도 없고 믿을 곳도 없다. 언젠가는 112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오히려 신고를 한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도 보도된 바가 있다. 위험할 때 어디에다가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하며 보호를 받아야 하나? 막막하고 답답하다. 마치 망망대해에 던져진 풀잎처럼 외롭고 무서운 세상이다.

 

나에게 진정 도움을 줄자가 누구인가? 물론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세금은 꼬박꼬박 내어야 하고,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아도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거두어갈 때는 맹수처럼 끌어가지만, 낸 세금에 대한 국가가 국민에게 해 주는 것은 체감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으로 자기 보신과 부정과 부패를 통한 축재를 수단으로 삼고 물러간다.

 

특히 의식구조의 변화로 인하여 자기가 남에게 해악을 하고도 폭언과 폭력 그리고 명예를 훼손하는 집단행위, 상대방의 비하와 음해하는 유인물을 뿌려대면서 자기의 욕심을 채워가는 무서운 이리 떼 같은 사람들이 많다. 공의는 무너지고 개인의 뜻이 정의이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고 불의를 마음껏 행사하면서 오히려 약자의 편처럼 위장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손을 들어 주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법원 판사는 무엇을 하는 분들인지 모른다. 대법원에 상고된 사건을 이년이 되어도 재판을 해 주지 않는다. 그 동안에 고등법원에서 승소한 측은 수억원의 재산상 피해가 속출되는 대도 감감 무소식이다. 변호사의 말을 빌리면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십 년 후가 될지 이십 년 후가 될지 대법원 마음이다. 도산을 하고 고소인이 사망한 뒤에 판결을 행할지 그것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최고의 양심이라고 우러러 바라보아야 하는 대법원이다.

 

이제는 약자가 없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사안만 있으면 집단 폭력 내지는 자해를 하면서 행악을 한다. 자기주장을 들어줄 때까지 행악을 한다. 민주주의를 방종주의로 알고 있다. 민주주의에 법치가 빠지면 밀림의 먹이사슬이 그대로 적용되는 동물의 왕국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믿고 살지 않으면 정신질환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믿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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