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칼럼]

어느 날 가인은 하나님께 성심성의껏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시지 아니하셨다. 그런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드릴 때 마다 하나님은 받으셨다. 이 사실을 안 가인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나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실까?’ 마음에 질투심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아벨을 죽이고 나면 하나님은 나의 제사를 받으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가인은 대답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안전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안전한 국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정치인들은 약속을 한다. 정부까지 안전에 온 힘을 쏟는 안전정책에 올인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안전치 못한 사건과 사고들이 오히려 더 생겨나고 있다. 하기야 여름이 되면 물놀이 사고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 아마 매해 있는 연례행사와도 같다. 군부대에서 총기사고는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언론 통제를 하는 시대라, 보도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선진국가라고 착각을 하고 살고 있다. 경제규모의 커짐이라든지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든지 사회 간접자본에 의한 생활환경 개선이라든지 복지의 확대 등으로 선진국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선진국이 되자면 먼저 최우선이 인간됨의 선진화와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는 국민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30-40년전의 농경사회로 돌아가 보자. 마을에서 어린아이가 울고 있으면 누군가가 다가간다. 그리고 왜 우는지 그 사정을 살핀다. 배가 고픈지, 아니면 부모님이 외출한 탓인지, 혹시 넘어져서 다쳤는지, 잘 살피고 그 아이의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을 것을 먹인다. 부모님이 외출하신 가정의 아이가 자기 부모를 찾으면 이웃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자녀들과 함께 놀게 한다. 위험한 놀이를 하거나 깊은 물가에서 물놀이를 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먼저 보는 어른이 마치 자기 자녀를 보호하듯이 주의를 주고, 자기 집으로 돌려보낸다든지 깊은 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훈계를 한다.

 

농경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그런 사회였다. 이웃과의 관계가 마치 혈연관계 같은 관심과 돌봄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였다. 가정에서 별식을 만들어도 이웃과 나눌 것을 먼저 예상하고 그 양을 정하셨다. 혼자서 산다는 것, 홀로를 위한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 물론 생명을 지켜주는 지킴으로서 서로 도우며 살았다.

 

소방서가 생겨난 것도 오래지 않다. 더욱이 119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다. 마을에 불이 나면 자기 집에 불이 난 것처럼 불을 끄는데 최선을 다했다. 마을에 홀로 사는 노인이나 부녀자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언제나 이웃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고 도와주었다.


현대인들은 가인이 하나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 입니까?”라고 반항하듯이 누구든지 가인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수없이 언론을 통하여 질타했기에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세월호 배 안의 승객들에게는 자기 위치에서 움직이지 말도록 방송을 하고, 선원들은 먼저 배를 빠져 나오는 시대, 이런 가인의 의식구조는 남의 생명을 지키는 행위를 포기한 인간이다. 결국 남의 생명을 위험에 방치하는 행위를 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사지로 몰아가는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에게는 피가 손에 묻어 있고 언제든지 이웃을 살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인의 후예는 자기 목적 달성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생명을 빼앗는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성을 순화시키지 아니하고는 안전을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왜 남의 생명을 지켜 주어야 하느냐?’ 라는 무책임한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안전법, 안전시스템, 안전요원을 만든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 이웃의 생명을 내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정신이 심어지지 않는 한 안전은 논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안전이 형식적인 단어라면 인간의 생명을 지키려는 마음은 본질에 해당되는 것이다.


언젠가 사랑과 사람사이에 유대성이 깨지고 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린 이후부터 ‘내가 왜 남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가? 결코 내게는 책임이 없다’는 의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모든 국민의 안전을 국가가 책임질 수 있을까? 사실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복지 사업의 한 예를 들어보자. 인생의 마지막 쉼터가 요양원이다. 모처럼 부모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요양원를 찾았다. 그곳에 근무하는 직원이 부모님께 음식 대접하는 자녀들을 못마땅한 눈초리와 많이 잡수시게 하면 안된다는 표독스러운 말을 뱉고 있다. 그 이유는 많이 잡수시면 배설물이 많아지고 배설물이 많아지면 직원의 수고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소에 요양원에 계시는 어른에게 제대로 음식을 드리고 계실까? 혹시 굶어서 영양실조로 조기에 운명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돈을 받고 생명 지키는 일에 취업을 했건만 가인 같은 의식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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