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지난 14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자의 친구, 길거리의 사도로 세계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이름은 원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골리오였다. 2013년 교황에 선출된 뒤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바꾸었다. 그만큼 그는 예수의 삶을 따랐던 성 프란치스코를 닮고자 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 가정의 철도회사 회계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세에 한 젊은 사제를 만나 영적 감명을 받고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22세에 수도원 공동체인 예수회에 입회한 뒤 지금껏 가난한 자를 섬기는 길을 걸어왔다. 이번 한국을 방문함으로서 한 국가의 외교적 유익과 천주교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을 하거나 만난 사람들은 열광적이고, 진심으로 그를 환영하였고, 한사코 그들의 마음에 억눌린 감정과 요구를 기탄없이 털어 내어놓는 모습을 모았다. 자기들의 노력으로는 자기들의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자 종교인이면서도 한 나라의 수장에게 자기들의 문제를 풀어주도록 요청하므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치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우리 문제를 남에게 토로하고, 부탁을 할까?’라는 생각이었다.


한국적 전통은 한 가정의 일은 그 가정에서 해결하고, 한 공동체의 사안은 그 공동체가 해결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아버지가 자녀를 엄히 훈계하다보면 아이에게 체벌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가정의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고, 정신과 체통이 제대로 선 집안은 어린 자녀마저 자기가 지금 당하는 체벌이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라 할지라도 집안을 뛰쳐나가거나 동네를 뛰어다니며 체벌을 면키 위해서 소란을 피우지 아니한다.

 

집안의 문제는 집안에서 해결한다. 엄한 훈계라도 달게 받고 인내하면서 부모와 마지막까지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제대로 가정의 교육과 전통, 체통이 없는 가정에는 부모가 체벌을 하거나 엄격한 교육을 시키면 집안을 뛰쳐나가기 일수 이다. 잠시 잠깐의 체벌을 면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한 집안 일로 온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드디어는 남의 집 식구가 그 가정의 일에 개입을 하기 시작한다. 너무 심하게 자녀를 체벌한 것이 아니냐는 둥, 버릇없이 어른의 명을 어기고 집안을 뛰쳐나갔다는 둥, 왜 아이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느냐는 등의 원망도 듣기 마련이다.

 

이리하여 자기 집안 문제에 온 동네가 개입을 하고, 심지어는 뛰쳐나간 아이 편을 들어서 그 집에서 아이를 숨겨두고, 아이 편이 되어서 아이의 요구사항을 그 아이의 부모에게 와서 항의 아닌 항의를 한다든지 자녀와 부모사이에 관계회복을 시키는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그 가정의 자존심과 집안 어른의 권위와 자존심이 실추되고, 그 가정의 자존심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교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교황님, 세월호 조사위원회가 하루 속히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해 주십시오.’라고 프란치스코의 손을 잡고, 하소연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남북문제의 해결책을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라며  성서에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훈계를 받은 우리 국가의 입장은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문제는 우리의 슬픔이요, 우리의 문제이다. 왜 그 문제를 외국에서 오신 진귀한 손님에게 부담을 주고, 압력행사를 해서라도 해결하게 해달라고 까지 해야 하는,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미숙한 국가일까?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남과 북의 문제도 그러하다. 한 두 해 고민해온 일이 아니다. 용서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제는 적대적 의식도 많이 사라졌다. 평화통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다. 할 수 있는 방법이면 무엇이든지 노력해왔다.


이번 광복절에도 대통령은 작지만 가능한 일부터 무엇이든지 실천해보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이다. 얼마 전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교황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를 만났다. 그러나 서로 화해하도록 당부도 하고, 부탁도 했다. 그러나 교황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치열한 전쟁이 시작 되었다.

 

위안부 문제도 그러하고, 노사문제도 그러하다. 우리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생각하고, 양보하고, 감정을 위로하고, 냉정하게 하나하나 우리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 외국에게 혹은 외국인사에게 하소연할 것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국민답게 우리 스스로 무슨 문제든지 풀어나가야 하고, 우리의 문제를 외부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습관은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주독립국가와 그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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