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아침저녁은 벌써 서늘해졌다. 한국의 가을 아침은 다이아몬드보다 맑다. 앞마당 감나무엔 참새들의 아침 웃음으로 행복을 선물한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초가을 빨랫줄에 줄지어 앉은 제비들을 보면 신사중에 신사들이다. 그래서 날렵한 사람을 보고 물찬제비라고 불렀던 것 같다. 멋진 ‘날음’은 그 선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멋지고, 아름답고, 늘 웃고 있는 새들도 생명이 있는 한 먹이를 먹어야 하고, 잠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새끼를 키워야 한다. 여기에 생존경쟁이라는 짐이 각각의 어깨에 메어져 있는 것이다.

 

삶의 짐이란, 곤충에서 사자까지 각각 자기의 감당할 만큼씩 지어져 있다. 그래서 각 생명은 100%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가끔 재벌의 총수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말로 경영의 긴장함을 표현할 때, 공감이 가는 것은 ‘먹고 살아야할까?’란 말속에 자기 삶의 무게를 100% 지고 있음을 솔직히 표현하기에 마음의 귀가 열려 들리는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왜 살아야 할까? 죽어버리면 그만일텐데’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생각은 사람 외에 다른 생명체는 아니할 것이다. 인간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생명체 중에 가장 미개한 존재가 아닌지도 모른다.


가을은 우울증이 점점 심해지는 계절이다. 낙엽이 지고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종말의 분위기여서일까? 가을에는 우울증 발병률이 높다고 한다. 이 우울증은 사람만이 앓는 병일까? 그래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자살율이 OECD국가 중에 최고가 한국이라고 한다. 왜 죽을까? 답은 간단하다. 두려움, 불안, 공포, 절망, 고독에서 오는 불행스런 오판이 아니겠는가?


한창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명량’이라는 영화에서 이순신을 통해서 작가는 두려움을 어떻게 이길까? 수백척의 왜군의 배를 앞에 두고, 거북선마저 불타버리고, 12척의 배를 앞에 두고 물밀듯 밀려오는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 그것은 수많은 왜적이 두려운 것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두려움인가를 분리한다. 왜군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두려움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 기록된 말씀과 동일한 생각을 갖는다. ‘죽으려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 자살을 한 것이다.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이 자살은 자기의 육체의 목숨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 고독, 공포, 우울을 죽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리적인 욕구가 가져오는 모든 사심을 내가 죽어야겠다는 결심으로 모두 죽여 버렸던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피 같은 땀을 쏟았다고 한다. 그의 기도는 오직 하나였다.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이 죽음을 면케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하나님)은 한마디도 예수님에게 답을 하시지 아니하신다. 다만 침묵을 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돌변한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그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사건이 기도 중에 일어난다. ‘나는 죽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라고 결심한다.

 

예수님의 삶의 무게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는 100%의 무게였다. 역시 죽음을 앞에 두고 고독, 두려움, 소외, 절망 같은 것이 예수님을 괴롭혔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이 찢기고, 피 흘리는 실제 사건 이전에 마음속에 세워진 십자가에 자기가 매순간마다 매달려 죽는 생각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제자들은 모두 잠자고 있었다. 답답한 노릇이다. 함께 삼년을 살았던 피붙이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들의 무관심에 더욱 고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죽이므로 십자가 다음에 오는 열매, 인류의 구원과 영생이란 위업을 이루셨던 것이다.


가장 미개한 병 우울증, 그래서 유일하게 인간만 자살을 하는 우매함이 우울증이란 병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목숨을 스스로 잃어가고 있지만, 가장 고귀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자살권이다. 내가 나를 죽일 수 있는 자유, 즉 죽기를 각오하고, 뜻을 위해서 나아가는 자기 죽임은 가장 인간다운 의를 이루는 특권인 것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워지는 길을 걸어야 하고, 그 길은 자기를 죽이는 길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서 살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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