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인류문화학에서는 인간의 문화 중에 가장 보수적이고, 변하지 않는 문화가 장례문화라고 적고 있다. 우리 민족은 장례문화와 종교와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교에 영향을 받은 효(孝)사상에 바탕을 둔 장례문화는 규범이 엄하고 절차에 질서가 있고, 의미가 깊은 상징적인 예행이 많다.

 

장례에는 상주가 있다. 상주가 만약 고인의 자녀라면 죄인이라고 스스로 지탄해야 한다. 부모님을 살아계시게 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한 것이 대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복은 죄인의 복장인 것이다. 장례 중에는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를 절제하여야 한다. 그리고 3년간 묘지에서 부모님의 시신과 함께 지내기까지 하는 철저한 효도를 실천케 한다.

 

유교적 장례 문화에 샤머니즘까지 복합되어 있다. 조상이 후손에게 복을 준다는 신심인 것이다. 조상을 잘 모시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액운이 있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장지까지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장지가 명당이냐 아니냐에 따라 후손이 잘되고 복을 받느냐 아니면 저주를 받고 망하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고 생각했으니 우리의 장례 문화는 복잡하고 미래의 운명까지 관계되는 것이 장례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래해오면서 장례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먼저 기독교 정신은 영생 부활이라는 신앙이 있다. 그래서 부모님의 돌아가심이 슬픔도 아니요, 죄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고 죽는 것은 ‘천국에 갔으므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히려 신심이 깊은 사람은 울지 않는다. 찬송을 하고, 기뻐하고, 감사한다.

 

눈물과 고통과 부조리가 많은 이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와 기쁨과 안식이 있는 곳으로 갔으니 감사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장례문화는 검소하고, 단순하며 간단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해주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절약을 가져오게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국가가 솔선수범하여 기독교 장례문화를 따르면서 전 국민에게 급속히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식 장례를 선호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장묘문화마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장묘문화는 매장이었다. 시신을 묘지에 모시고 분묘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실상 화장은 기독교 장묘에도 없다. 불교식이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화장을 금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 장묘도 화장으로 점점 옮겨가고 있다.

 

화장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마지막 마무리는 매우 간단해지기 시작했다. 본래 화장이 끝나면 강물에 뿌렸다. 이러한 화장 다음의 단순처리는 보편적이지 아니한 특수한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전염병을 앓았다든지, 자살을 했다든지 아니면 무연고자라든지 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히 있는 일로 화장을 하고, 골분을 바다나 강 그리고 고향산천에 뿌리고 만다. 그 이후 이 땅에 고인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최근에 와서 국토는 산자의 땅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모아져서 법적으로 매장이 불허될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산이 70%를 차지한 국토이다. 산마다 묘지가 즐비하다. 밭에도 묘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국토 이용에 묘지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한 국토를 합리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당연히 조치해야 할 일이었다. 더욱이 국민의식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자연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정부에서도 자연장을 권장하면서 편리하게 자연장을 하도록 법적으로 그 장을 열어주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옥 정원에도 화장 골분을 뿌릴 수 있도록 허가를 하고 있으니 자연장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사람들은 역시 보수적이다. 아직도 선산이라고 해서 묘지단장이나 관리에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여기 새롭게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이러한 편리위주와 국토이용의 합리성을 위한 모든 조치는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이다. 이로 인하여 조상에 대한 경로사상이 훼손될까 하는 문제가 우려되는 것이다.

 

조상은 실상 자기 자신이다. 심지어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DNA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DNA가 무엇인가? 조상의 DNA가 나의 DNA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조상은 즉 나 자신이다. 조상의 특징이 나의 특징으로 나에게 현존되어 있고, 조상의 병 이력이 나의 병 이력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의사는 진단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조상의 병 이력을 질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나를 위해서 살았던 조상, 부모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분의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서 무심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논리의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지만 연로하시고 병약한 부모님에 대하여 편리성과 합리적인 태도로 대한다면 예가 무너지고, 효정신이 무시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오늘의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무례한 예우나 거동이 불편하면 요양원으로 모시게 된다. 요양원으로 모신 이후부터 아예 부모님을 잊어버리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부모님에 대한 효정신은 분명히 교육되어야 하며 끊임없이 실천되어야 할 우리들의 정신가치인 것이다. 벌써 추석절이 다가왔다. 벌초 행렬이 두어주간 동안 고속도로를 메우고 있다. 아직은 효정신이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증거이다. 효정신은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정신적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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