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기브스가 등장했다고 한다. 시댁으로 가는 며느리가 시댁에서 명절 음식을 조리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으로 오른팔에 부착하는 기브스처럼 생긴 용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 기브스 같은 용기를 끼우고 가면 열외 대우를 받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온 매스컴이 떠들었으니 그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가면 혈연관계도 아니요, 인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부모처럼 사랑과 헌신으로 양육해준 부모도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남편의 부모이지 나의 부모는 아니다. 그런데 친부모 이상으로 예의를 갖추고 섬겨야 하니 이거야 말로 쉬운 일은 아니다. 예의범절은 그렇다 치자 가장 큰 문제는 문화충격이다. 아무리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가 연령차이가 없다 해도 20-3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같은 울타리 안에 있어도 많은 차이가 있다. 시부모는 농경사회 출신이다. 며느리는 산업사회와 정보시대의 문화에 익숙하다. 농경사회는 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며느리들은 개인생활 취향이다. 공동체 생활에는 가족체제가 시할아버지가 으뜸이다. 그리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순이다. 여기에 남성위주의 문화이다. 가부장적인 문화가 오랫동안 정착되어온 가정이다.

 

여기에 반해 며느리들은 한 사람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고이고이 길러서 두 부모가 한 딸만 바라보고 키웠으니 모든 것이 딸 위주이다. 서열은 온데 간데도 없다. 오로지 하나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다보니 딸이 가정에서 중심이 되고 만다. 부모가 상을 딸 앞에 차려놓고 옥이야 금이야 길러왔다. 그런데 시댁에는 식사 상을 한상 차리면 어른 먼저이다. 그리고 남성우선이다. 한 차례 어른이나 아들들이 식사를 끝내야 그 상에 여성들이 우르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된다. 전혀 생소한 문화다.

 

문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권침해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남녀 차별이 심하다고 생각이 된다. 시댁에 올 때마다 이 문제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고, 시가에 명절마다 와야 하는가? 라는 반항심마저 든다.

 

동서가 몇이 된다. 동서지간에도 갈등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이 간다. 특히 조리에 있어서의 무심코 하는 평가가 또한 불편하다. 음식이 잘못되어서가 문제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의 입맛과 취향의 문제이다.

 

며느리의 조리 솜씨는 친정에서는 인정을 받고, 칭찬도 듣는다. 그러나 시댁에서 조리하는 방법과는 다르다. 그러니 맛도 다르다. 익숙지 않는 며느리의 음식에 표정이나 젓가락의 동향이 한가로우면 이 또한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열등생 취급을 받는다. 문화의 차이, 조리를 잘못해서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다. 그런데 조리 솜씨의 평가로 이어지는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시댁에서 머문다는 자체가 힘들고, 흥미 없는 일이다. 친정에선 자기의 의사가 제일 으뜸이었다. 시댁에선 명함도 못 내미는 것이다. 복장도 불편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심지어는 화장실도 불편하다. 어디 편한 곳이 하나도 없다. 남편에게 눈썹 올리며 자꾸만 빨리 가자고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남편은 이 사정, 저 사정을 다 봐야 한다. 형제들 간의 관계, 아버지와 자기 관계 등등을 생각하며 얌체처럼 쉽게 훌쩍 떠나가기에 힘든 일이다.

 

며느리는 마음에 불만과 불평을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리고 귀경하는 차에 오르자마자 복수전이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와 석 달 동안 음식을 같은 상에서 먹지 않겠다고 한다. “시집처럼 살아봐” 하면서 한상 둘러 앉아 남녀 모든 식구가 먹지 못한 보복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생활비도 끊었다고 한다. 원한이 쌓인 것이다.

 

부모님의 입장에는 상상만 하고, 유추만 한다. 왜 저런 행동을 할까? 그러나 알 턱이 없다. 아들에게 전화를 해도 신통한 대답 없이 그저 미지근한 대답만 들을 뿐이다. 사실은 며느리보다 시어머니가 일찍 일어나 조리를 했고, 며칠 전부터 자녀들이 귀향한다고 여러 가지 준비에 골몰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 몇 배의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수고하고 힘들고 어려운 듯한 뉘앙스의 아들 전화에 발끈한다. ‘뭘 했다고?’ 이렇게 부대끼면서도 다음 명절에 다시 모인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다시 반복된다. 문화 충격이 큰 오늘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유서 깊은 고부갈등으로 일컬어진다. 오늘 며느리가 내일의 시어머니가 된다. 다시 새로 들어온 며느리와 똑같은 갈등을 만들어 가야 할까?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