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유광석 박사의 ‘종교시장의 이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시장경제 원리를 종교에 대입시켜서 논했다고 한다. 종교를 너무 성스럽게만 대하여 교리나 영적인면만 주목하면서 종교가 가진 너무나 많은 면을 놓쳐버리고 있다는 지적을 서두에 적고 있다. 이 책은 합리적 선택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이다. 간단히 말해 모든 인간이 자신의 시간이나 돈, 정성을 소비할 때는 그럴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 합리적 선택이론에서 비롯된 종교시장 이론을 펼치고 있다. “기독교는 공급자 혹은 판매자, 신자는 수요자 혹은 구매자이며, 이들은 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하듯 종교 활동을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각각 브라만교와 유대교라는 당시의 기존 공급자가 제공하지 못한 새로운 종교 서비스를 선보임으로써 새 수요층을 흡수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후 세계적으로 탈 국교화가 되면서 종교 자유경제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각각의 종교 역시 처음 창시될 때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사회와 호흡하면서 유연하게 진화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과 민족, 인종을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된 종교들은 글로벌시장 시대에 어디에서나 유통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수요층을 붙잡아 놓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대교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된 것이 기독교라고 보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유대교가 종교화 되었기에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 이전 시대, 종교가 형성되기 전 히브리 사람들의 진실한 신심(神心)을 여호와는 선택하셨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던 원시 신앙으로 돌아간 것이 기독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사건 이후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기독교가 태동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사건은 이미 창세기 초기에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하도록 유혹한 사탄을 심판하겠다고 약속을 하셨다.(창세기3:15)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창세기의 원 복음과 계산할 수 없는 시차가 있지만 그것은 동일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고 에덴을 떠나간 인간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죽고 사람을 사랑하여 하나 되게 할 뜻을 이미 세워놓은 예정이다. 기독교는 구약성서 다음 시대에서 시작됨이 아니라 구약성서 이전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다만 경전을 사용함에 있어 유대교나 기독교가 구약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동일한 점이 전혀 없다.

 

경전이 문제가 아니라 신학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 과연 그 신앙의 주체가 누구일까? 불자와 부처님, 그리고 기독교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신앙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에도 스님들이 복자들이나 불자를 위해서 공부를 하고, 참선을 하고,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고행하고, 참선을 할 뿐이다. 신도들에게 무엇을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절을 경영하는 주지 스님은 불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법당과 사람 관리를 할 수밖에 없기에 마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님들은 자신을 위한 자신의 득도에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가?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목사가 될 때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목사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시에 의해 목회자는 사용당하고 있다.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다.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을까? 아니다. 성령에 의한 계시의 선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보이기는 많은 교인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설교를 한다. 그래서 공급자와 수요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목사는 사람들 앞에 설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 받아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할 때, 진정한 목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성전건축도 그러하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성전건축을 한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재산은 교인의 총유제이다. 교회의 재산은 모두 교인의 것이다. 목사의 것이 아니다. 목사가 투자하며 성전을 짓고, 교인들을 모아서 헌금을 거두고, 헌금이 목사의 소유가 된다면 공급자와 수요자 관계이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성도들의 것이다. 교회의 실제 주인은 성도들이다. 신도들의 결의에 의해서 예산이 세워지고 집행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결코 목사와 성도 사이가 공급자와 수요자의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의 청빙으로 그 교회에서 시무할 수 있다. 목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교인들의 주인이기도 하다. 목사의 하루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경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목사의 생활비를 교회가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항의하지 않는다. 교회의 주인은 신도들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주인은 하나님과 교인들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진화가 아니라 본디 모습으로 돌아갈 때,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존경받고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종교가 글로벌 서비스를 하려면 개혁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처음의 자태로 돌아갈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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