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아시아인의 잔치인 아시안게임이 끝날 무렵 인민군 복장을 한 북한 인사가 방문하였다. 아시안게임의 폐막식에 참여한다고 했지만, 그는 인민군복을 입고 VIP 좌석에 앉아있었다. 스포츠 정신이란, 한 마디로 평화이다. 이 평화의 제전에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입는 군복을 입고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심히 궁금하였다.


그러나 분명 받은 인상은 우리의 삶의 진실이다. 우리는 지금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전쟁 중에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지금도 휴전선에서는 나의 아들, 딸 그리고 젊은 핏줄들이 밤잠을 자지 못하고 보초를 서고 있다. 그런 덕택에 후방은 편안하고, 평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린다.

 

전쟁 중에 있는 나라는 무엇이 가장 우선순위일까? 깨어 있는 정신이다. 적이 누구이며, 적과 함께 대치되어 있는 우리는 사적(私的)이익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가(國家)공동체의 유익이 우선시 되어야 전시(戰時)국민이 가져야 할 정신인 것이다.

 

한국인은 자주 정신이 강하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단군 이래 900회 이상의 난을 치루었다. 전시에 당한 우리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생명은 물론 인격적인 함몰 그리고 물질적 약탈, 더 나아가서 민족의 핏줄까지 탁해진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꿋꿋이 살아왔다.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꺼져가는 등불 같았으나 꺼지지 아니하고, 바람에 찢어질 듯 흔들렸으나 찢기지 아니하고, 지금도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 그 뿌리는 자주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국민 스스로가 군인이 되어 의병이란 이름표를 달고 내 가족, 내 가문,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분연히 일어섰다. 기미독립운동 땐, 일본이 나라를 삼키고, 치밀한 식민정치를 하고 있는 즈음에도 분연히 일어나 나의 조국은 독립국가라고 외쳤다. 자주정신의 분출이었다. 6.25 한국전쟁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쟁을 하는 어리석은 민족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동족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세계 16개국의 우방들이 남한을 도왔다. 그래서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이 갈리고 말았다.

 

그 당시 전쟁을 치르고 난 상황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동물이 먹을거리도 구하기 힘들었고, 추운 겨울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일어섰다.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들어서는 기적을 이루었다. 6.25 이후 초근목피했지만, 정부를 원망하거나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느냐고 원망해본 일이 없다. 모든 국민이 스스로 자기들의 짐을 지고, 열심히 일하여 일으킨 나라이다. 나의 자식이 6.25에 죽었다고 나라를 원망하지도 아니하였다. 다만 죽은 아들을 위해서 눈물을 뿌렸다. 전사자 보상하라고 시위를 하거나 해본 일이 없다. 조국을 지키다 죽은 영광이라는 생각에 생살을 찢는 아픔도 말없이 이겨 냈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했다.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베트남과 우리는 아무런 원한도, 싸울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조국의 경제를 위해서 나아갔다. 베트남에서의 희생은 조국의 경제를 위해서 참여했다. 시체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남편의 죽음을, 아버지를 잃었음을, 형제를 먼저 보냈음을 아파했을 뿐이지 조국에게 보상하라고 대들어본 적이 없다.

 

병사가 미국으로부터 받아야 할 보상의 절반 이상 정부가 떼어갔다. 그래도 누구하나 원망하거나 이유를 달고 시위를 해 본 일이 없다. 철저하게 공동체를 위한 투철한 희생정신이 한국의 정신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인가 확실치는 않지만, ‘복지정책’이 정치인들로부터 국민들에게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나라가 국민의 복지를 책임져 드리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입후보자들, 그들의 선거정치는 한국의 자주정신을 약화시키고, 국가 의존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나랏돈으로 자기가 인심을 쓰겠다고 외치고 난 후 그 공과도 자신은 대통령이 되든지, 국회의원이 되든지, 권력을 얻는 일에만 몰두하고, 정치인으로 취직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복지정책을 외쳐댔던 것이다. 나랏돈으로 인심 쓰겠다고 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국민의 자주정신을 말살시키는 일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정서를 보면 정치도, 전쟁도, 경제도 경쟁이며, 매사가 자기 나라의 유익을 위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남북이 나누어져서 전시 중에 잠시 휴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의 나라가 복지사회를 만든다고 해서 전쟁국가가 복지를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자기 부모를 부양해도 국가에서 수당을 주고, 보편적 복지를 외치며 부자도 국가의 복지혜택을 마다하지 않고 받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해주고 있나’를 바라는 것은 한국정신이 아니다. ‘국민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헌신할까’ 하는 것이 한국정신이다. 남의 신세 지는 것을 불명예로 아는 우리의 정신, 이 정신을 상실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본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농경사회는 마을에 혼례나 상이 나면 온 동네가 함께 도와서 치렀다. 이를 두레라고 하기도 한다. 그 당시 이런 일도 많았다. 아예 본인이 잔칫집에 가서 일을 도와 줘야 하므로 제집의 식구들의 며칠 끼니를 미리 준비해두고, 잔칫집에 도우러 갔다. 그리고 자기 자녀나 식구들은 잔칫집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남의 집 잔치를 도우러간다고 해서 온 식구가 잔칫집에 와서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우러 온 사람이 오히려 신세를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두레정신 역시 자주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정신이었다.


한국인의 정신, 자주정신은 복지를 지원해주기를 바라지를 않는다. 세금은 얼마를 내든지 내야 될 국민의 의무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가는 것이 당연히 생각되어야 한국인다운 한국인이다. 더욱이 우리는 전시중(戰時中)에 있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