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종교하면 사람들은 보통 신(神)을 떠올린다. 우리의 정신문화에 깊이 뿌리박은 샤머니즘의 영향이 크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의 종교본능은 초월자에 대한 기대와 신비한 사건의 주인공이 자신이기를 바라는 희망 때문일 수도 있다.

 

신앙심과 초월의 경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득도를 위해서 사바세계를 뒤로 하고 증진해 나가는 수행이 불교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의 주제는 신(神)이 아닌 사람이다. 유교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이며, 자아와 타아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덕(德)을 이룰 수 있을까?” 라는 과제를 안고 철저한 인간관계 중심의 정치철학이기도 하다. 여기에 신(神)은 상관이 없다. 그러나 어느새 효의 정점(頂点)인 제사문화는 죽은 조상이 귀신이 되어 제사상에 음식을 드신다는 논리를 펴는 유교인들이 많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계시와 하나님이 사람 되신 예수로 출발한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를 만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 아예 그 구원이 하나님(神)에 의한 은혜(恩惠)로 주어지므로 기만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천주교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인간의 공로가 구원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신(神)이란, 절대를 빼고는 종교를 논하기가 어렵다.

 

특히 샤머니즘은 입신을 하여 영매자가 되어야 종교인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신 체험 자체를 신앙이란 믿고 있다. 신비를 빼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회교 역시 계시가 중심에 있다. 코란이다. 그런데 정보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과학절대주의를 신봉하면서도 그 반대 끝에 있는 신비주의를 절절히 바라고 있다. 손에는 최첨단의 기기를 들고 있고, 자기의 뇌를 무시하고, 첨단 통신기기와 컴퓨터를 의지하고 사는 사이보그 같이 살아가지만, 현대인 영혼은 텅텅 비어가고 있고, 이유 없는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절대의존감정은 위기의식까지 느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절절하나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 편리를 위해 인간관계마저 저버린 체 독신주의를 외치고, 골드 외톨이라 입으로는 외쳐대지만, 하루 생활이 끝나고 자기 독신거처에 돌아와 불을 켜면, 텅 빈 허허로움이 그의 폐부를 짓누르고 왈칵 이유 없는 눈물을 흘리고 싶어지는 의지할 곳 없는 광야의 나라에 갇혀 살고 있기에 자신도 모르는 절대 의존감정이 고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걸그룹의 나신 가까운 몸동작으로도 메울 수 없고, K팝의 신나는 음악과 열광하는 예술이나 스포츠도 어느 감성의 일부분을 자극하거나 위로할 뿐 결코 자신의 영혼을 달래는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가 없다. 초자아(철학적인 초자아가 아니라 창조되기 전의 자아가 창조주 안에 있었음)가 부르짖는 절대 의존자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 급기야는 자기 부정(자살)까지 부르는 외로움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신(神)은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가? 이 인간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시고 계시는가?’ 라는 질문을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 신(神)은 침묵하고 있다. 다만 내가 나를 위하여 멀리하고, 경원하며, 자기 선을 긋고 사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인 자신이 자신을 얽매고 안으로 문을 잠근 탓으로 자기 스스로 만든 소외를 까맣게 잊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눈물짓는 자신의 영혼의 공허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신(神)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계시이다. 서로의 문빗장을 열어라. 그리고 그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라. 피차 이기적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 원수 관계 밖에 더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신(神)이 살아계신다는 증거인 계시 중의 계시인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원수와 원수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남과 여는 원수관계가 아닌가? 미치도록 좋아한다. 그래서 사랑의 띠에 묶인다. 그때가 그들의 자녀가 아닌가? 자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아니하면 자녀를 양육할 수가 없다. 부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장본인이 누군가? 바로 자녀이다. 부모의 원수는 자녀이다. 보라 그 뿌리가 연로하신 부모를 원수처럼 대하는 자녀가 우리 모두가 아닌가?

 

부부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 미치도록 목숨 다해 사랑한다. 사랑이 무엇인가? 희생이다. 희생이란, 결국 자원하여 자기가 자기를 소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누구의 원수인지는 잘 알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로미오와 줄리엣은 숭고한 사랑의 표상이다. 그러나 역시 둘 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죽고 말았다. 누가 누구의 원수인가?


여기 신(神)의 체험이 있다. 계시에 대한 복종이 있다. 오늘의 종교(宗敎)가 초월만 지향한다면 어디에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 지구촌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從敎)가 될 때, 전 인류의 진정한 절대의존의 자리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섬김 외에 또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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