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그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낮은 국가였다. 그러나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 자살률이 25%가 증가되었다고 한다. 한 약사는 30년간 약국을 경영하고 난 후 연령이 높아 약국을 그만두었다. 연금으로 넉넉한 삶을 살다가 경제 불황이 닥쳐와 연금이 지나칠 정도로 줄었다. 그는 공원 나무 앞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나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자존심을 잃은 자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유서의 내용이다.

그는 국가가 연금관리를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학자들은 “GDP의 하락은 자살률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자살률과 극심한 결핍이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소유를 많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정신적인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

KAL기를 띄우는 회장의 맏딸이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승무원을 질타하다가 격분하여 250여명의 승객이 탄 여객기를 다시 회항하여 그 승무원을 내리게 하고 출발했다고 한다. 정신적인 결핍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러하다. 자기가 만족치 않기 때문에 그 불만을 승무원에게 표출한 것이다. 故이병철 회장이 죽기 전에 자신의 정신적인 고뇌를 어떤 성직자에게 질문했던 내용이 책으로 발간되었다. ‘잊혀진 질문’이라는 이름의 책속에는 故이병철 회장이 얼마나 고뇌를 많이 했는가를 알 수 있는 단면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인간은 알기(知識)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지식의 상징인 대학교수라든가 훌륭한 학자가 정계에 입문하여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아직 미성숙한 사춘기 아이들 같은 행위를 한다. 왜 학교마다 교수의 성추행이 문제로 부상할까? 구순기(oral stage)를 벗어나지 못한 인격이라고 해도 틀리지 아니할 것이다. 그렇다면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인심을 사는가? 많은 예술가나 학자들을 보면 살아있을 때는 각광받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작품이나 철학이 뭇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이름이 칭송 받는 사람이 많다. 묘비에 그의 치적을 새겨 두었지만 그 묘에서 나와서 자기 치적을 읽을 수 있을까?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의 묘비를 읽어본 들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인생이 태어났는가? 결핍해지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태어날 때 아기는 울어댄다. 배고픔을 채워달라는 악다구니가 아닌가? 인간은 희망이 있다. 이 희망이 크면 클수록 결핍은 더 깊고, 크게 불어난다. 초등학교 시절 유엔 사무총장이 된다고 자기 장래를 썼던 친구는 지금 꽃 장사를 하고 있다. 어느 날엔가 물었다. “유엔 사무총장이 꽃장사로 세월을 보내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낸다고 웃고만 있다. 그는 말했다. “연료 값이 내려서 요즘 하우스에 기름  값이 적게 들어 꽃 키우기는 좋은데 꽃값이 떨어지는 것이 걱정이라”고 한다.

자기로서는 그것이 결핍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이다. 성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차지한다고 했다. 마음의 가난은 극심한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양한 결핍이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천국에 대한 결핍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치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 결국은 천국에서 살수 있다고 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촌에는 다양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저마다 결핍하다.

미국은 인종차별로 몸살을 앓고 있다. 피부색이 결핍과 우월을 가져와 일어나는 불상사다. 흑인은 백인을 동경하고, 백인은 흑인을 동경하여 서로 결핍을 느낀다면 이러한 불상사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큰 사람 앞에서 열등의식을 갖는다. 이 결핍에 의해서 세계를 움켜쥐고 흔든 사람들은 모두 키가 작은 사람이다. 키가 작은 나폴레옹이 쓰고 다니던 모자가 26억원에 경매되었다고 한다. 결핍은 오히려 행운이다. 결핍으로 인하여 결핍에 자기를 완전히 투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분야에 전문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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