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요즘은 크리스마스의 캐롤도 듣기 힘들다.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나무에 은종, 금종이 달리던 문화도 이젠 시들해 가는 것 같다. 과연 성일(聖日)이 축제의 날일까?

예수가 태어나던 그 해 수리아 총독이 식민지 백성의 호구조사를 위해서 호적을 정리하라는 명령에 의해서 요셉가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약혼녀 마리아와 함께 먼 여행길을 갔던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요셉에겐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과 고민이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을 했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인의 손목 한 번 잡아본 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약혼한 그녀가 임신을 했다.’ 생각을 골똘히 하면 할수록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머리가 멍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에는 돌멩이가 쥐어졌다. ‘법대로다. 간음한 여인은 돌려 쳐 죽여야 한다. 아니다 돌로 쳐 죽인다고 해서 나의 화가 풀리랴? 나의 망쳐진 첫 사랑은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 마리아를 만나 흥분된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몇 날 몇 달을 뜬눈으로 보내며 함께 사랑할 앞날을 계획하며 하얗게 밤을 보내지 아니하였는가? 그런데 어찌 그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었단 말인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마리아가 나와 정혼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함성을 지르고 다닐까?’ 그러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아무것도 못해 마리아를 사랑하니까?’ 요셉은 사랑의 노예가 되어 다시 쥐 죽은 듯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었다.

사막의 바람은 세차가 불어오고 있었다. 마리아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날 밤의 꿈은 생시인지 꿈인지 아직도 구분이 안 간다. 천사가 나타났다. ‘마리아, 당신은 복 되다.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또렷이 귀에 들렸고, 눈으로 보았다. 그 이후 그의 몸은 임산부가 되어갔다.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말하랴? 해봤자 알아들을 사람도 없고, 믿어줄 사람도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하나님께 맡겨두자.

이 목숨이 죽어도 하나님이 받으실 목숨, 내가 아들 낳아 길러도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 기르는 것이다. 나는 여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집종이다. 종이 주인을 위해 죽는 것보다 영광이 또 어디에 있으랴?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는 것이 인간의 숨소리 아닌가? 숨이 멈추면 나는 바람결에 날아가 버릴 것을 차라리 평안을 누리자.’ 마리아는 평안한 마음으로 베들레헴으로 갔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고향으로 왔는지 발 디딜 틈도 없다. 여관집도 꽉 차버렸다. 그런데 뱃속 태아는 분만의 기미를 보인다.

어찌하랴? 하늘이라도 가려야 할 곳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그 때 인자한 여관 주인이 말구유를 허락해줬다. 진통의 아픔도, 첫 생산의 두려움도 또한 생명을 낳았다는 신비도 없었다. 계시가 이루어진 사건 앞에 이미 마리아는 거룩해져 있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리라.’ 하늘이 땅으로 내려앉아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새 기원이 시작된 날, 누가 누구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대인이 태어났다고 믿는 박사들이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왔다.

무슨 조화일까? 양들을 몰고 다니면서 빈궁한살이를 하는 목자들도 찾아왔다. 아기에게 경배를 한다.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고 헛소문도 퍼져나갔다. 요셉은 말이 없었다. 요셉에게도 꿈은 있었다. 마리아가 잉태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알려주는 계시를 들었다. 체념하기도 했다.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자기 아들이 아닌 하나님 아들을 사랑하고 키우기로 했다. 그날 아기가 태어난 날이 성일이 되었다. 거룩한 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기가 예수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여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인류의 죄의 멍에를 두 어깨에 멘 날이 아기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내가 너를 위해 희생당하는 것이 아닌가?

성일은 축제가 아니다.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해야 하겠다는 결심과 그 일을 도모하고, 시작하는 것이 성일 날 해야 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건의 현상이어야 한다. 남의 잘못을 보고 침묵을 지키고, 남의 허물을 보고 자기 가슴으로 쓸어안고, 남의 멍에를 내가 지고 말없이 고행을 즐기는 사건의 현장을 영원히 유지해가는 것이다. 현란한 장식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더욱 화려하게 한다. 성일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고독한 한숨을 달랠 곳을 찾아야 하고, 불화와 불목으로 깨어진 평화가 다시 이룩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날이 바로 성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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