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프랑스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 중에 삐에르 신부라는 분이 있다. 신부님은 빈민 구호단체인 엠마우스(EMMAUS)를 창설하신 분이다. 이 신부님의 저서에 ‘단순한 기쁨’이라는 비망록이 있다. 그 중에 나오는 그의 경험담이다.

한 청년이 자살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와 자기 인생의 마지막 상담을 시작했다. 그는 죽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흥분하여 설명을 했다. 경제 문제, 가정 문제의 파탄으로 사회가 자기를 소외시키므로 더 이상 살수 없다고 말했다.

신부님은 동정어린 눈빛으로 그의 말을 충분이 들어본 다음 ‘나 같으면 죽겠다.’ ‘당연히 죽어야지’ ‘죽을 수밖에 없구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조금만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죽으면 안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청년은 대답했다.

‘어차피 죽을 몸이니 죽기 전에 신부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제가 신부님을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신부님을 돕기로 했다. 얼마 후 청년은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였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든지 이렇게 베풀었다면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 제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일을 하고 섬기고 하는 사이에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으며, 이제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이루는 것이 행복하다는 상식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주는데 행복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국민 소득이 만불($10,000)이하일 때는 새마을 운동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 때는 불평불만이 사회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80년대를 넘어서면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주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민주화가 바르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 이전 소위 군사독재시절 그 불행한 시절엔 불평불만이 많았다. 행복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서로 나누고 주는 정서로 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끼니를 잇지 못하는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뼈가 부러져라 일하면서도 식사를 드실 식량이 없어 굶어야 하는 어머니가 비일비재했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자녀는 어머니만 바라보며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챈다. 이런 상황에서 눈물 흘리며 희생하는 삶, 주는 삶이 있어 행복했다. 형제가 10촌이 한 지붕에 살았다.

한 식구 20여명 가정이 되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만의 욕심을 채우지는 않았다. 큰 그릇에 밥을 담아 온 식구가 한 밥상에서 같이 먹었다.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숟가락을 스르르 놓는다. 다른 형제가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는 의미이다. 가장 큰 형님이 먼저 숟가락을 놓는다. 그리고 그 다음이 둘째다. 이러한 남을 배려하는 삶이 몸에 배었다. 이러한 나눔과 양보를 할 때에 다 키웠다고 했다. 가난이 불행을 가져오지 않는다. 다만 소유에 집착하고, 의지할 때, 불행이 찾아오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찾아오셨다. ‘내 형에게 말씀하셔서 유산을 나누어 갖게 하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했다. 이 때, 예수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이어서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둘 창고를 새로 짓자.” 그는 창고를 헐고 새롭게 창고를 크게 지었다. 그리고 자기의 소유를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리고 자물쇠로 단단히 잠그고 방으로 들어가 “이제는 편히 쉬자.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는 그만 죽고 말았다. 자기를 위해서 쌓아둔 것이 모두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라고 하셨다. 재산이 수억이 있는 가장이 자기의 아내와 자기의 자녀들을 죽였다. 그리고 자기도 죽으려고 했다. 지식도 있고, 재산도 있고, 가족도 있고, 사회적인 기득권 자에 속한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자기 생각으로는 자기 가족이 현재의 소유로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 사람 뿐일까? 나의 소유가 나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한다는 의식은 나를 불행하게 한다. 가난하여도 나누어줄 때, 살맛나는 세상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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