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어느 늦가을, 그날은 하늘이 회색이었다. 아랫집 초가지붕에 흰옷 한 벌이 올라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금방 알았지만, 지병으로 오래 누워계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떤 이는 간밤에 혼불이 나가는 것을 보셨다고 한다.

앞산 주사봉 중턱 노루재에서 멈추었다니, 아마 풍수가 오지 않아도 매장지는 그곳이 될 것 이라고 동네 우물가에 아낙들이 점을 치고 있었다. 혼불이 날아가다가 머무는 곳이 장지가 된다는 것은 흔히 들어본 일이 있다. 지붕 위에 깃발처럼 날리던 흰옷이 바람에 날리워져서 마당에 떨어졌다. 머슴 한 사람이 지붕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다시 흰옷을 들고 한참 흔들더니 지붕의 새끼줄 사이에 옷을 끼워놓았다.

고인이 식사 때나 제사 때에 집을 찾아오기 쉽게 고인이 평소에 입었던 옷을 지붕위에 펼쳐 놓는다고 한다.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가 왠지 쓸쓸해 보인다. 감은 추수가 다 끝나고 남은 감 몇 개를 감나무 꼭대기에 까치밥으로 남겨 놓았다. 아니다. 고인이 흰 저고리를 입고 찾아오시다가 감나무 꼭대기의 까치밥부터 잡수실 것만 같은 기분이다.

외국인이 한국을 찾아와서 도무지 이해 못하는 것이 있다. ‘왜 병원마다 장례식장이 있느냐’ 라고 하는 반문은 일리가 있다. 외국은 장례식장과 병원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장례식은 죽은 망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장례식을 위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병원은 환자 자신을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죽을 생각을 하고 병원을 찾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실은 병원에서 산 사람은 없다. 모두 병원에서 죽는다.

병원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뿐 생명을 연장할 수 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질병을 치료하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질병의 치료와 죽음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질병에 걸리지 않아도 죽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가장 많이 죽는 사람들이 아마 교통사고 일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 순간에 죽어 버리고 만다.

그 외에도 천재지변이라든지, 자살이라든지, 죽어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런데 ‘나도 죽는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죽은 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에 대해 준비하는 사람은 흔히 않다. 존재 하는 것은 모두 종말이 있다. 생명을 가지고 있든지 없든지 끝이 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종말이 없다.

적어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영혼도 존재한다고 인지 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이 지구촌에 살기 시작한 후부터 죽은 다음까지 산다고 믿었기에 집 떠난 영혼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제사에 참여한다고 믿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죽으면 그 다음 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치 노후를 준비하는 것처럼 사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옛사람들은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과실을 따지 않고 그냥 두는 이유가 있었다. 날 짐승의 먹이로 남겨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 양식을 옛사람들은 준비 하였다. 소위 적선라고 하였다. 내가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내가 죽은 후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식량이라고 생각했다. 현세에서 내가 선을 베푸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영원히 살 영혼의 양식으로 생각했으니 자신만을 위한 삶이란 생각조차 하지 아니하였다. 나눔에 나의 영혼의 양식이라고 생각한 옛사람들은 분명히 현자들이었다.

설이 다가온다. 제상(祭床)에서 대접받을 생각보다 이웃에게 적선한 것으로 영혼이 배부를 생각을 한 옛사람의 지혜를 실천하여 설날 가난한 자를 찾아가는 나눔이, 설다운 설을 지내는 명절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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