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한 마을에 도인(道人)이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온 몸에 받고 있었다. 그는 검약한 생활을 했다. 언제나 마을과 이웃마을을 다니며 시주를 받아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도 높은 도덕성과 정성어린 기도와 명상의 자태가 어느 도인보다도 진지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도인의 집에 들었다. 이 사실을 안 도사는 허겁지겁 동네를 경망스럽게 뛰어 다니면서 도둑을 보지 못했느냐고 다급하게 묻고 다녔다. 한 소년이 재 너머 읍내 시장 쪽으로 갔다고 하자 도인은 근엄함도 잊은 체,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 도둑을 잡기 위해 재를 넘어 읍내시장으로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비웃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더니, 도둑이 훔쳐갈 만한 것을 숨겨 두었는가보지?’라고 겉과 속이 다른 도인을 비난하지 시작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사람의 속이라고 사람마다 혀를 쳤다. 그런데 드디어 도인은 읍내 시장에서 그 도둑을 잡았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당신 우리 집 도자기 훔쳐갔지?” 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자기는 비싼 것이고, 오래된 진품이라 싼 가격에 팔아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갔다. 도둑이 훔쳐간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 경망스럽게 뛰어다닌 것이 아니었다. 혹시 그 도둑이 제값을 받지 못할까봐 그것이 염려되어 그 진품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토록 동분서주 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있을까? 죄를 지는 환경과 여건 그리고 사정을 보면 다 이유가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 그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인간의 인성은 한 살에서 다섯 살까지 그 기본이 다 형성된다고 한다. 한 살에서 다섯 살 아이는 자의에 의해 인성 형성이 되는 사람은 없다. 타의에 의해서 인성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어머니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공간과 환경, 상황과 사회적 영향도 그의 인성 형성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그렇게 인격의 기본 골격이 세워지더라도 자기도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인간이다. 내가 왜 이것을 좋아할까? 나는 이 색깔을 선택할까? 나는 왜 이런 놀이를 즐길까? 이 모든 것의 원인제공은 자아 또는 비자아 즉 무의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상습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아이는 그의 인성이 형성될 때 어떤 영향에 의해서 훔쳐지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순수한 자기 양심과 이성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양육과정에서 형성된 후천적 성격과 인성 그리고 교육을 통한 인격의 변화,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적인 영향까지 고려하면 과연 한 인간의 선행과 악행이 그 사람에게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을 바르게 이해만 한다면 과연 그를 정죄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간음을 행하고 있는 여인을 잡아 왔다. 종교지도자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다. 그들이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율법에 의해서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있다. 그 율법은 수천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정죄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용서하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율법 지상주의 자들과의 마찰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하고 눈을 부릅뜨고 곧 돌을 던질 것 같은 사람들은 이 여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돈을 던질 것 같은 노기가 충천된 상태였다.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가르친 모든 교훈을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인을 용서하라고 한다면 율법에 저촉되어 예수님이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얼마간 침묵을 지킨 다음 땅에다 글씨를 쓰고 계셨다. 그 글귀는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도 이 글귀를 보고는 돌을 던질 수가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현장에서 빠져 나갔다. 그리고 그 여인만 남았다.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다.

종교란 무엇일까?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그가 되어 보지 않고는 아무도 그를 모른다. 왜 그가 그런 행위를 했는지, 본인도 모를 수 있다. 내가 왜 이러한 말과 행위를 했는지, 다만 그만 안다. 아니 자기도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은 행위 한 것을 기준하여 정죄하고 처벌하고 보복하는 것이다. 그가 되어 봐야 그를 용서 할 수 있다. 이해가 용서를 낳는다. 그리고 사랑도 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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