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잔혹했던 곳은 독일군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사건 일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를 표방하면서 유대인 600여만 명을 가스실에 보낸 이 일은 인류역사에 가장 야만적인 행위일 것이다. 누구나 그 수용소에 들어가면 죽어서 재가 되어 나온다.

그 수용소에서 누가 작곡 작사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반드시 오신다.”라는 내용의 노래였다.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런데도 동료가 가스실로 끌려 들어간다. 이땐 가사를 더 첨가한다. “하나님은 너무 늦게 오시기도 하신다.”라는 가사였다. 포로 중에 정신과 의사가 한사람이 있었다. 그는 첨가된 가사는 절대 부르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히 살아서 나아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침에 해가 뜨기만 하면 부서진 유리조각으로 말끔히 면도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나의 출소일이다.’라고 그는 철저하게 믿는 것이다. 의복도 최대한 단정하게 입었다. 어느 날 그의 믿음대로 출소를 하였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면적 사건이다. 자신은 현재에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세계는 따로 있다. 자신의 내면의 믿고 있는 세계에 자신은 살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보는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일이지만, 그의 내면의 세계에서는 이미 일어난 사실이다. 지금 인류는 꿈을 꾸고 있다. 슈퍼 지능이 개발될 것이다. 인간의 지능을 훌쩍 넘어선 로봇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를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IT의 황제 빌게이츠도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앞으로 DNA를 조작하여 인간의 질병은 정복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얼마까지 늘어날는지 예측불허이다. 심지어는 주사 한번 맞으면 빠진 치근이 새로 자란다고 한다.

어쩌면 이시대의 예언자는 만화가들 인지도 모른다. 만화가가 상상하여 그리는 그림대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유한이다. 인간 자신이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욕망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겠지만. 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원은 다르지만 인간은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물이 아니다. 믿음이란 상상의 세계를 현재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신(神)이 계시한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인 약속은 내면에는 이미 성취되어 있다. 그 성취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기독교 교회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천 년 전이다. 어느 날 예루살렘의 요한이라는 사람의 집의 다락방에 약 120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각기 다른 타국에서 온 사람들로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불같은 것이 내려왔다. 그런데 하늘에서 불같은 것이 내려 온 후부터 서로 언어가 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믿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자기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대신 죽었다는 것이다. 확신이 왔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믿어졌다.

그전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자기의 못 박힌 손과 허리에 창으로 찔린 흔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믿기 시작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예수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도 믿기 시작했다.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오시지 아니하였고, 미래에 오실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세계는 그렇게 확신을 하고 있었다. 박해가 시작되었다. 원형 경기장에서 몇 날 며칠을 굶긴 사자들은 풀어 놓자 무방비 상태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포효하는 사자들이 순식간에 사람을 삼킨다. 그러나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즉시 천국에 가므로 주님을 만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마음은 천국에 가서 살고 있다. 믿음 안에서는 이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인간의 지식으로 놀라울 정도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신비에로 몰입되어 있다. 죽으면서도 하늘을 쳐다보며 웃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누가 신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사람이 있는가?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피조물의 눈부신 발전과 창조주의 성품에 참여 되어지는 것은 초 차원과 차원의 차이다. 믿음은 초차원에로 가는 사닥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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