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인류가 산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무수한 행성과 행성의 교차 회전중에 언제 이 지구라는 자그마한 먼지 덩어리에 측량불가의 행성이 부딪칠지도 모른다.

실제 이 땅의 공룡이 사라진 원인도 이런류의 충돌사건이라고 유추한다. 작게는 미생물의 위협이다. 한편 맹수가 인간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 인간의 창조됨을 먼지로 창조되었다고 적은 성서의 의미는 매우 깊은 뜻이 있다. 모든 존재는 처음 원료로 돌아간다. 밀림을 호령하는 사자도 마지막에는 앙상한 무기물이 되어 모래바람에 쓸쓸히 묻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류를 괴롭히는 미생물에 의한 전염병을 살펴보면 한센씨병으로 부터 시작되어 에이즈까지 무수한 생명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반생명체로 인하여 죽었다. 정치도, 경제도, 철학도 심지어 군사력도 이 미세한 생명체 앞에는 무릎을 꿇고 만다.

인류를 ⅓이나 죽게 한 페스트(흑사병)는 1348년 유럽을 강타했다. 페스트는 남부에 살고 있는 곰쥐의 벼룩을 통해 옮겨지며 14세기 몽골군의 유럽 침략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결핵은 인도에선 기원전 1000년경, 중국에선 수나라 때 창궐하여 최근 200년 동안 10억 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끊임없는 도전과 연구를 계속했고, 그리고 면역을 키워가면서 대처해왔다. 가장 최근의 에이즈역시 1983년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몽따니에 박사가 에이즈 바이러스(HIV)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산다는 것, 그것은 죽음을 죽이는 일이 사는 것이다. 메르스가 한국을 강타했다. 지금은 우왕좌왕 한다. ‘대통령이 책임이 있다. 누가 책임이 있다’고 하면서 열변을 토한다. 아무에게도 책임은 없다. 누가 발병되고 싶은 사람이 있겠으며 전염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 소위  글로벌 세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전염되고 본의 아니게 전염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이야기 하기전에 나의 생명은 내가 지켜야 한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스스로 방역하고 스스로 자신을 최대한 격리해야 한다. 스스로의 면역을 강하게 하여야 한다. 깊은 수면을 취하고 정시에 식사를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보다 윤리적인 삶을 유지하며 희망찬 노래를 부르고 즐거운 담소가 필요할 것이다. 미생물은 공기로도 옮겨가기도 하고, 접촉으로도 옮긴다.

사실 미생물의 번식은 기하급수적으로 인간의 집단적이거나 조직적이거나 체계로서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이땐 각개전투가 가장 효율적이지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두려움이란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심리적 위축은 오히려 면역의 약화를 가져와 바이러스 침투를 용이케 하는 몸 상태를 만들 수도 있다. 일어나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담소하고 즐기고 사랑해야 한다. 이때 우리의 몸은 활기를 찾고 강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보라. 의사나 간호사 병원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던지며 전투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환자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땀방울을 흘리며 방호복을 입고 필사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박수도 쳐주어야 하고, 존경도 표해야 한다. 이 세상에 등장한 치명적인 것들이 다 나타났다가도 사라지고 없어지기도 하며 어디에도 찾을 수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메르스 역시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질 날이 온다.

어머니가 자녀를 낳으면 양수가 나온다고 한다. 양수는 못이길 미생물이 없다고 한다. 사람이 이 땅에 살게 하기 위해서 지구촌을 만드신 창조주의 뜻이 있다. 우리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것만이 인간에게 도전하게 하고, 능히 처치할 수 있는 적만 존재하도록 허여하였다고 성서는 적고 있다. 도전하는 존재가 없다면 인간은 모두 스스로 삶의 동기를 상실하고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말 것이다. 인류가 산다는 것은 도전해 오는 적이 있기에 이에 대한 응전을 하므로 스스로 살아가는 동기가 부여 되는 것이다.

응전할 것이 없으면 모두가 자포자기 한다. 인간은 있으나마나한 생명 가치까지 망각할 수가 있다. 싸울 것이 있어서 좋다. 생기가 난다. 인간은 머리를 싸매며 연구를 하고, “너 잘했다 나 잘했다.” 서로 책임 추궁하고 도무지 풀리지 아니할 것 같은 헝클어진 실타래를 붙잡고 물고 흔들고 늘어지는 것이 보기 좋은 삶이다.

농사를 지어 보았는가? 돌아서면 잡초요, 돌아서면 병충해다. 농부는 등에 땀을 흘리면서 농약을 치고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어디서든 호미를 들고 밭을 매고 있다. 잔등에 땀이 흐르고 얼굴이 달아올라 숨이 턱에 찬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무서리가 내리고 농산물을 거두어들이는 때가 온다. 추수하는 재미에 땀 흘린 여름은 기억조차 하지 아니한다. 곧 메르스가 기억도 안나는 날이 온다. 내가 나를 이기는 길 밖에 없다. 메르스가 적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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