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사랑이란 묘하다. 어느 날 갑자기 폐부에 소리 없이 들어와 사람을 오한하게 한다. 사랑이란 병에 걸리면 이성도 마비가 되고, 의지도 눈 녹듯 녹는다.

눈이 멀어져 세상은 다 아름다워지고,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서고 만다. 온 우주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듯하다. 달을 보아도 ‘그도 달을 볼까?’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내가 먹지 않고 그대가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 바람이 차다. 내 몸에 스치는 냉기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느끼는 냉기처럼 느껴진다.

연세가 90이 넘는 노 철학교수에게 물었다. “자녀를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자녀는 제3자 입니까?” “만약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결혼할 자신은 없으나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결혼과 사랑은 별개가 아닌데, 별개처럼 들린다. 오랜 인생의 경험에 의한 경험일 것이다.

사랑은 자기가 결단하면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주관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은 쌍방이 공적인 행위를 한다. 결혼서약을 많은 증인들 앞에서 한다. 그리고 혼인신고라는 법적 약속을 한다. 그리고 가정이란 공동체를 이룬다. 여기서부터는 자기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뜻은 약속을 필히 지켜야 할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연애가 감정만으로 된다면 결혼은 감성, 지성, 의지가 모두 총동원 되어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랑은 둘이서 하지만 전혀 다른 두 사람, 다른 독립된 생명체인 자녀가 태어난다. 이 자녀는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자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다.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두 사람이 사랑한 결과물이다. 자녀의 약속은 절대적 책임으로 부부에게 부여되는 의무이다. 이것은 외면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다. 자기 생명의 연장으로 자녀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다른 사랑이 가정공동체에 틈을 타고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바람”이라고 한다. 비윤리적행위이다. 왜 이런 바람이 가정의 문틈으로 들어 왔는지, 그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을 생리적인 욕구충족으로만 여기며 결혼을 이룬 가정은 이러한 “바람”이 들어오기가 쉽다.

결혼 전까지 서로가 성을 초월하여 전인격적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충분한 이해와 서로의 인격이 성숙된 후 이룬 결혼은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아니할 확률이 높다. 이혼에 있어서 파탄주의를 주장하는 법 전문가들은 의미가 있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과거가 어찌 되었든 현재 차디차게 식은 사랑을 되돌릴 수 없다면 이혼을 하는 것이 두 사람의 행복에 유익된다고 보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이혼을 금하고 있다.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이미 간음을 했거든 이혼을 허락하라고 하셨다. 이미 사실혼이 있다면, 또 중복하여 기존 결혼 사이에 아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들어 주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어느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는 남편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그 여인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응답하였다. “남편이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남편이 여럿 있으나 없다고 답한 것이 맞다. 현재의 남편도 너의 남편이 아니지 않느냐?”하는 것이다. 사랑 없는 부부의 성행위는 성폭력이다. 간음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미 마음이 떠난 가정생활이란 마치 독방에 갇힌 죄수에게 전담교도관을 세운 것처럼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가 되어 고통만 줄 뿐이다.

이럴 바에야 유책주의 보다는 파탄주의에 훨씬 더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이웃”이라는 관계적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난다. 어린아이 때는 남을 배려할 수 없는 미성숙 인격이기에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성숙해지고 자랄수록 자기만을 위해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좀 더 속이 꽉 찬 사람들은 이웃의 잘됨이 나의 잘됨이요 이웃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는 역설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가까운 이웃 중에 부모님이 계신다. 부모도 이웃이다. 자녀도 이웃 중의 이웃이다. 이웃을 불행하게 하면 내가 불행하다. 그렇다면 나타난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정이란 이웃을 내던지고 다수 이웃의 불행을 만드는 것이 과연 내 행복에 유익한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깊이깊이 생각해야 할 인간됨의 필연적 책임감을 외면한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법으로 단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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