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⑥

[부천신문] 위의 사진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제1왕조 제5대 왕 덴(Den)의 무덤(아비도스)에서 나온 상아조각이다. 대략 기원전 2960-2915년으로 추정한다. 대영박물관측은 이 조각을 근거로 파라오 덴(Den)이 동방의 아시아족을 최초로 정복했다고 추정한다. 과연 그럴까?

상형문자 이해와 해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생각 없이” 기존 개념을 수용하고 적용하는 경험주의적 사고 습관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경험주의적 사고’를 쉽게 수용하는 까닭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경험주의의 폐단을 극복하자는 의도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말 그 자체는 특정 패턴과 기능에 대한 강조이자, 동시에 그 기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 속에서 나온다.

경험론자와 경험주의의 위험성은 체험을 통한 인식만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여, 새로운 관념 속에서 경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차단한다는 것에 있다. 경험이란 관념을 등록시키는 의식 없이 무의미한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겁박하는 어떠한 권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어떠한 권위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것은 권위를 능가하는 어떤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권위를 보증하는 기존 개념에 대해 새로운 개념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설령, 새로운 개념이 없어도 기존 개념에 흔들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기존 개념에 대한 자기의 입장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것을 허(虛)하게 사고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대영박물관의 견해를 허하게 생각해 보자. 특히 왼쪽에 서 있는 파라오 덴()이 자신의 왕홀로 아시아인을 공격하는 장면을 강조한 해석을 허하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작을 보면, 위에서 내려치는 파라오 덴 보다 아래에서 방어하면서 동시에 다리를 거는 아시아인의 자세가 더 안정적이다.

그림만 보면 아시아인이 더 위협적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위협이 10번()정도였고, 수로()로 쳐들어온 적이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적에게 시달리면 지친다. 덴 뒤의 글귀처럼 “보편정신()”이 부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영박물관측이 말하는 아시아 정복의 근거는 저승사자 야누비스()의 깃대를 보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동방의 적은 칼()을 놓게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의 문제는 “정복”이라는 서구적 관념이다. 만일 전쟁 이후의 평화가 정착된 까닭을 정복이 아니라, 파라오 덴(Den)의 이름처럼, 에너지()를 쥐는() “포용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외적에 대한 서구적 접근법을 제고해야 한다. 대영박물관측의 해석은 포용이 정복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를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한다.

잦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보편정신이 부식되었다”는 해석도 거꾸로 “보편정신이 살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고기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상온에 놓아두면 썩기 때문에 “상하다”는 뜻이 있다. 반면에, 방금 잡아들어 올린 물고기의 뛰는 모습에서 “신선하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물고기의 어떤 순간과 상태를 포착하여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 몫의 잣대는 전쟁정치와 경험주의적 사고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적일 지라도 포용과 관용이라는 새로운 관념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사고방식에까지 영향 끼침을 간과하지 말자.

<dogang.jeon@gmail.com>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