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성서 이야기라 흥미가 있을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죽었다. 사울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울 사람이라 하여 기름 부름(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인 행사는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일반 백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골리앗과 다윗의 대결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이기에 이해가 될 것이다. 소년 목동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마에 명중시켜 쓰러지게 하므로 백성들이 소년 다윗에게 관심이 기우러졌다. 이로 인하여 사울 왕의 딸과 결혼을 하여 왕가와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사울이 죽자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헤브론 지방에서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된다. 이때 사울 왕의 신임을 받던 아브넬(Abner) 장군은 사울의 남은 한 아들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에서 옹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로 나라를 세웠다. 결국 유다와 이스라엘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 와중에 다윗의 누이의 아들 셋 중에 아사헬이 이스라엘의 장군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전사를 하므로 아브넬은 다윗 왕가에게 원수가 되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을 세울 때부터 사울 왕가를 재건할 뜻은 없었다. 그는 야욕을 품고 군주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앞세우고 왕국을 건설했을 뿐이다. 이러다보니 그는 안하무인격이 된 것이다.

결국 그는 본성을 드러냈다. 이스보셋의 선왕 사울의 첩 리스바를 통간한 것이다. 왕의 첩은 왕의 소유물이다. 선왕이 죽으면 그 첩은 다음 왕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이 여인을 통간했다는 것은 왕의 것을 강탈했다는 것이며, 왕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왕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권위나 무력에 의한 힘에 눌려서 한마디 원망도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물어보아야 하였기에 사실을 추궁한 것에 분개하여 아브넬은 왕 이스보셋을 버리고,

유다 왕 다윗에게로 전향하여 다윗 왕가로 귀순할 뜻을 전령을 보내 회신을 기다렸다. 다윗의 답변이 이러하였다. 사울 왕의 딸이자 자기의 부인 미갈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아브넬은 그 말대로 미갈을 데리고 다윗 왕에게로 귀순을 하였다. 다윗 왕은 그를 반갑게 맞았고, 잔치를 벌이며 그를 환영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평안히 살도록 배려를 했다. 얼마 후 다윗 왕 아래의 총사령관 요압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이스라엘의 이스보셋 왕을 배신하고 아브넬이 귀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윗이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를 평안히 살라고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요압은 분통이 터졌다. 자기 동생을 기브온 전쟁에서 죽인 원수이자 다윗을 국왕으로서의 즉위를 반대하고 이스보셋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을 창건하여 한민족을 둘로 나누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권력의 야욕을 탐하던 자를 처단하지는 않고 받아들여서 평안히 지내라고 한 다윗의 조치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떠나간 아브넬을 다시 궁정으로 돌아오게 한 후 요압장군이 직접 아브넬을 암살하고 말았다.

자기 동생을 죽인 원수요 민족을 분열시키고 다윗 왕가에 대적한 원수이기에 그는 사적 감정으로 복수를 해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아브넬의 장례식을 정중히 치르게 하고, 자신이 그 장례식에 참여하여 대성통곡을 하였다. 다윗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상여를 따라가면서 울고 또 울었다. 다윗은 애가(슬픈 노래)를 직접 지었다.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가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려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이를 보고 온 백성이 함께 슬피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이지 않음도 증명 되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북쪽에 있는 민족에게 적의를 품고 싸워야 하며, 언제까지 북한은 남한을 위협하고 자기 체제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김씨 일가만을 옹립하며, 북의 기득권을 누리는 무리들을 인정하고 참아야 하는가’라는 아픔이 있다. 그렇다고 적의를 버리고 한민족이라 해서 민 가슴을 내미는 것은 이상통일론일 뿐 결국 계속 대치하다 보면 “실미도” 사건과 같은 사태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은 함께 뜨거워 져야 한다. 북의 극한 가난을 나의 배고픔으로 느껴야 하고, 체제유지에 급급한 집권층의 악행에 치는 떨리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따뜻해 질 수 있는 화해의 눈물을 준비해야 한다. 아픔을 함께 느끼는 유기적인 심장을 준비하지 아니하면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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