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⑧

▲ 주석 : 빛의 영혼이 전하는 말씀 “권력자들이 삶의 땅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어떠한 삶의 모습이 당신의 말씀을 정당화시켜 줍니까?”

[부천신문] 빛과 삶의 상보성(相補性, complementarity)은 자연스럽게 어둠()을 싫어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둠에다 惡의 이름을 붙이고, 빛에다 善의 이름을 붙이길 좋아한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것일까? 문학적인 유비로써는 너무나 훌륭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 만큼 허점도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빛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햇빛, 달빛, 별빛. 문학적인 이분법은 낮의 햇빛에 견주어 밤의 달빛과 별빛으로 구분 짓는다. 반면, 빛에 대한 논리적 추론은 그것과는 상이한 잣대로 구분 짓는다. 즉, 빛이면서 빛인 것과 빛이 아니면서 빛인 것으로 구분 짓는다.

햇빛과 별빛은 빛 자신이 스스로 빛을 뿜는 빛이고, 달빛은 스스로 빛을 뿜어 내지 못하는 빛, 소위 ‘반영된 빛’이다. 이 잣대로 어둠을 파악하면, 어둠이란 그저 ‘빛의 없음’이다. 그냥 虛 혹은 空일 뿐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문학가라도 허 그 자체에다 선을 붙이거나 악을 붙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허공의 빛이란 말은 몰라도. 허공 그 자체가 빛의 역할을 할 때를 일컫는 말이기에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둠의 빛이란 말도 구사할 수 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어둠의 빛이란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형용모순적인 말이 곧 악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문학가는 없겠지만, 우리 일상의 언어 습관에 따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거리낌 없이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누구나 공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한 감정 투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감정이입은 논리적 추론을 마비시키고, 나아가 사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 그 자체를 가로막는다. 과연 악이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어둠의 빛을 악과 동일시하는 것일까?

고대 이집트인의 사고에서 악은 반영된 빛이었다. 질투의 화신 세트(Seth;)처럼, 어떤 부착된 욕망이 무질서를 만들면 악이 된다. 佛家에서는 이 반영된 빛을 세 종류로 나눈다. 자신의 마음을 삼켜버리는 탐욕, 집착의 좌절에 따른 분노, 그리고 똥오줌 못 가리는 어리석음.

하지만, 반영된 빛 그 자체가 곧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 또한 반영된 빛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집트인과 불가 모두 달빛을 지혜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반영된 빛’이 어떤 때는 악이 되고, 어떤 때는 지혜로 되는 것일까?

악은 반영된 빛이 빛임을 참칭할 때 생긴다. 반면, 반영된 빛이 빛 없는 어둠에게 빛을 사유하게끔 만들 때, 그것은 지혜가 되고 선이 된다. 여기서 빛이 없는 어둠이 빛을 사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물리학적으로 생각해 보자. 저 유명한 슈뢰딩거의 음(-)의 엔트로피(entropy)로써의 생명 개념을 차용하자.

빛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사라지는 성질이 있으므로, 어둠이란 양(+)의 엔트로피를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그렇다면 어둠이 빛을 사유한다는 말은 음의 엔트로피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네 아버지()가 자식을 봉양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삶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빛의 얼굴이고, 이것이 빛의 이름()이다. 지혜의 눈()이란 대중의 이와 같은 삶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작금의 정치에서는 비록 그 눈이 사라졌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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