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⑨

▲ 주석 : 침묵의 여신 메르세제르트(Mersegert)는 동굴에서 사는 코브라다. 이 뱀은 새벽이 되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바위에 고인 첫 이슬을 먹는다고 한다. 삶을 여는 운명의 여정(旅程)도 이와 같다.

[부천신문] 코브라가 쓴 관()은 ‘보이지 않는’ 창조의 신 아몬(Amon;)과 태양의 신 라(Ra;)의 결합으로 “생명의 빛”을 뜻한다. 제단에 있는 연꽃은 태양신 라가 어둠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밝히는 과정을 뜻한다.

썩은 시궁창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하나의 개체가 자신의 삶을 자각할 때 생명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는 말(로고스)의 전제, 즉 침묵에서 나온다. 말씀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적 언설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침묵은, 인간이 스스로 신과 동등한 관계를 만든 이후 한 최초의 행위였다. 말하자면, 말로써 세상의 동물을 지배하라는 신의 특권을 포기한 최초의 행위였다. 그래서 침묵은 신의 노예가 아닌 인간의 삶 그 자체를 표상한다. 신의 빛을 갖지 못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바로 침묵이다.  

게다가 침묵은 쓸데없는 말에 대한 좋은 대응법이다. 말이란 반응이 없을 때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쓸데없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쓸데없는 말, 그만해!”를 외치고 싶어 한다. 그 순간, 쓸데없는 말은 침묵을 깬다. 쓸데없는 말은 누군가에게 호불호(好不好)를 낳게 하고, 결국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길을 잃는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사다.

너무 과한 것 아닐까? 쓸데없는 말이 시끄러워서, “제발 그만해!”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길을 잃게 된다는 말이. 가만히 생각해 보자. ①쓸데없는 말, ②쓸데없는 말에 대응, ③그 대응에 대응. ①과 ②는 대상수준의 이야기고, ②와 ③은 대상과 메타수준의 이야기다. 따라서 비약은 전자보다는 후자에서 일어난다.

①에 대한 바른 대응이 침묵이라면, ②는 ①과 같은 수준, 즉 쓸데없는 말로 귀결되고, ③은 쓸데없는 말의 메타수준이므로 쓸데 있는 말로 귀결된다. 이것이 ③이 갈망하는 비약의 효과이다. 하지만 ②의 경우를, ①과 ③에 귀속시키지 말고 어떤 상황에 대한 하나의 “선언(manifestation)”이라고 간주한다면, ③이야말로 가장 쓸데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③은 ②의 주관성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례 또한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흔하다. ③의 어법을 구사하는 부모님이 그렇고, 학교 선생님이 그렇다. “분별심(分別心)은 깨닫지 못한 자의 언설”이라고 말하는 스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권력적 담화는 ③의 어법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말에도 함정이 있다. 어법(語法)으로써의 ③이 아니라 행법(行法)으로써의 ③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는 주로 선승(禪僧)들이 쓰는 기법인데, 이는 ①과 ②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될 수 있다. 말에서 출발해서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에서 행동으로의 비약, 즉 초월을 만들기 때문에 ③의 행법은 권력효과를 무화시키고 타자에게 깨달음을 낳게 할지 모른다.

가장 좋은 ③의 행법은 밤하늘의 별 중에서 침묵의 별, 메르세제르트 별을 찾는 것이다. 이 별을 보면서 자기 운명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처럼 길이 보인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함께 천문대에 가서 침묵의 별을 찾아보길 바란다. 침묵의 별은 여름 밤하늘의 중앙에 있다.

서양에서는 이를 왕관자리로 오해하고 있지만, 우리문화권에서는 이를 “관삭(貫索)”이라 한다.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진정으로 자신과 대면하는 숭고한 환골탈태를 뜻한다.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침묵하라! 그와 같이 자식의 삶에 대해서도 침묵하라! 그래야만 자식이 생명의 빛을 뿜어낼 수 있다. 이집트 속담에 따르면,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한 일은 소 백 마리가 한 일과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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