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⑪

▲ <주석>원숭이로 변신한 지혜의 신 토트(Thot) 앞에서 서기가 글을 새기는 모습 <해석> 세로: 헤르모폴리스의 주인과 지도자는 왕국에 헌정한 공물(hotep)로 선정함 / 그의 공물에 담긴 선한 마음이 그에게 왕권을 부여 / 카(ka; 넋)를 위한 사랑스런 모습이 영생의 선물이라고 야누비스의 사제들이 여왕에게 카의 목소리를 전달 / 여왕을 위해 글을 새기는데, 이는 남편을 위한 축제로 남편을 사랑하는 모습이 덕으로 인정받은 내용임.가로: 헤르모폴리스를 보호하는 호루스(Horus)신은 지위 高下를 막론하고 모든 카에게 빛을 준다는 글을 새기는데, 이로써 모든 신들과 두 땅의 왕국이 영원히 연결됨.

[부천신문] 어리석인 질문이 있다. 말과 문자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할까? 당연히 말발이 센 사람은 말이 더 소중할 것이고 글발이 센 사람은 문자가 더 소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발이 센 사람은 누구일까? 서양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크라테스를 거론할 것이다.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 하나로 천하를 평정하였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발이 밀리면 은근히 흉내 내기 술법을 동원하여 상대를 궁지에 몰아붙이고, 그래서 상대가 당황하면 슬쩍 자기의 말을 덧붙이면 그만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맹위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말장난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도 나온다. 저술(ecriture)은 “지금 여기”라는 現存(presence)을 문제 삼으면 언제나 과거의 글이 된다는 식이다. 말하자면, 시간의 화살은 언제나 작동하기에 글로 그것을 고정시키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런 의미에서 저술은 과거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現存은 現前이다. 이 같은 논리 전개는 제논에게서 배운 것 같다.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되어 있다!”는 제논의 말을 뒤집어 “지금 여기로 정지되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운동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드. 이는 신의 침을 흙으로 빚어 만든 뱀에 얽힌 이야기를 문자화 한 것이다. 이처럼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문자이다. 즉, 사라지는 ‘말(parole)’을 지금 여기에 담아 놓는 것이 ‘문자(langue)’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비틀어서 “지금 여기”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 문자는 과거의 문자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논리는 새롭게 창조한 문자를 거부하는 것으로 쓰인다.

“저술활동은 외부세계에 대한 시뮬라크르”이고, “새롭게 창조된 기술(technique)도 인간 영혼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술은 노예노동에서 쓰이는 기능 정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기술의 발전에 따른 도구의 진화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것이라는 인식을 얻지 못했다.

이와 너무 대조적으로, 위의 조각상의 글을 음미해 보자. 문명의 핵심에 공물(hotep;)이 있고, 그것에 대한 마음의 표현(nes;혀)이 옥좌를 준다. 그래서 “공물로써 넋을 달랜다!”는 말(medou;)은 곧 “영혼의 영원성()”에 대한 소리(kherou;)에 관여한다. 그리고 이를 글로 새겨(sesh;), 말과 소리를 물질화시킨다. 그래서 물질 생산의 영속성 속에 영혼의 영원성으로 이어진다는 유물론적인 이집트사상이 제도(institution)화 된다.

과연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영혼의 문제가 물질과의 교류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을까? 물질과 영혼 간에 소통이 없는 것, 그것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dogang.jeon@gmail.com>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