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⑬

▲ 주석 : 독수리의 날개는 진리의 여신 마트의 상징이다. 마트는 태양의 신 라(Ra)의 어머니다.

[부천신문] 진리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진리란 참과 거짓의 기준이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다. 말하자면, 아데꽌티오(adaequantio;적합성)와 꼰벤티엔티아(conventientia;관습성)를 어떻게 절합(articulation)시킬까가 문제다.

아데꽌티오와 꼰벤티엔티아의 관계를 대립적(opposite)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상보적(complementary)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전자는 종교전쟁을 일으킨 바티칸의 입장이었고 후자는 그것을 비판한 스피노자의 입장이었다.

특히 후자의 입장에서는 진리의 조건(condition)도 진리의 문제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컨디션이 좋으면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을 컨디션이 나쁘면 성질을 내는 우리의 습성도 진리의 조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의 담지자라고 자각할 때, 어떠한 조건들을 갖추어야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부각된다.

아데꽌티오의 문제는 데카르트 이래로 대상과 사유의 자명성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자명성에 대한 반영으로서 진리관념은 하나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기 때문에 심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 결과 진리 자체가 어떤 조건에서 제기되는가하는 스피노자의 문제로 귀결된다.

게다가 아데꽌티오의 문제는 ‘사유와 대상 간의 일치’ 여부를 따지게 만든다. 이는 세 가지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다.

①만일 어떤 진리관념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명난다면, 자기가 진리의 담지자라고 여기는 자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할까? ②어디에서 거짓관념이 생기는 것일까? ③대상과 사유간의 일치를 주장하는 확신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자신이 진리의 빛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그 확신의 근거를 밝히고 설명해야 한다. “체험적으로 느꼈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설명 없이 진리를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빛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보다 어떤 사안에 대해 더 우월한 설명력을 보여야 한다. 게다가 좀 더 현실성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고대이집트인들은 진리의 문제에 언제나 “위대성()”의 문제를 소환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논리적 설명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서 이미 증명되었으므로 아데꽌티오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꼰벤티엔티아의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데꽌티오와 꼰벤티엔티아를 각각 덴드라의 신전과 피라미드로 유비시켜서 생각해 보자. 덴드라의 신전은 춘분일에만 신전의 기둥이 빛을 동굴의 입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반면, 피라미드는 태양이 있으면 언제나 빛을 내뿜는다. 아프리카의 석양은 그 자체로 온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장광을 연출한다. 여기에 245미터의 거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빛을 뿜어내는 그 광휘를 상상해 보자.

그것은 아름다움을 떠나 인간 스스로가 만든 업적에 큰 감명을 더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삶도 저 위대한 피라미드처럼 빛나길 바랄지 모른다.

마트의 진리는 이와 같이 모든 곳에 평등하게 내리 쏟아지는 빛, “사회적 차원의 인식”을 뜻한다. 그 인식의 시작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대중들의 삶에 담긴 애환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만일 사회적 차원의 인식을 사회 지도층의 사고에서만 찾으면, 그것은 곧 악(isefet;)이 된다.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우리네의 아버지()의 직업 활동을 작은 새()가 뒤에서 쪼아대는 것처럼 위대성을 훼손시킬지 모른다.

수천 년 전부터 사회 지도층은 언제나 효율성과 편리성의 이름 속에서 대중의 생존권을 억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집트문명의 질서는 마트의 진리 속에서만 구현됨을 목 놓아 강조했던 것 같다.

실제로 진리란 관념적인 선악의 문제에서 공허하게 날개 짓을 하지 않는다. 선악이 삶의 생존권 차원과 결합될 때에만 마트의 날개는 질서와 정의의 날개를 편다. 미네르바 부엉이가 황혼녘에 비상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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