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로마가 왜 망했는가? 이 대답은 확연히 역사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정신은 누구에 의하여 무너졌는가? 라는 물음에는 대답할 사람들이 많지 않다.

로마는 힘이 정의였다.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말한다. 평화는 “강자의 힘에 의해 억눌러져 침묵할 상태” 이것을 평화라고 했다. 로마는 이 진리를 철저히 믿고 실천해갔다. 그러나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독교를 믿는 노예들에 의해서였다. 언제나 증오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로마시민의 억압아래 있는 노예들 사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예의 거처에서 새어나오는 기도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 주인이 요즘은 힘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나의 등을 채찍으로 치지만, 예전 같지 않게 아픔이 덜 합니다. 건강이 나빠진 것 같습니다. 주인의 건강을 지켜 주시옵소서.” 노예의 주인인 로마시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질환이 난 것인가?’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노예들이 모이는 은밀한 집회 장소에서 노예의 주인인 로마인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노예가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예가 바뀌고 주인도 바뀌었다. 드디어는 콘스탄틴 대제 때 로마는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난 3일 터키 남서부 해변에 시리아 난민인 세 살 된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가 숨진 채 엎어져 있었다. 쿠르디와 그의 부모 등 시리아인 23명이 탄 난민선이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 코스 섬으로 가려다 전복되어 최소 1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지중해는 적어도 하루에 10여명의 난민이 수장되고 있다. 그런데 쿠르디의 죽음에 대한 사연이 전 세계에 보도 되었다. 한 소년의 죽음은 유럽인들의 가슴 속 깊이 숨어있던 휴머니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국가는 국가로서의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연민이나 동정에 의해서 국가정책을 결정할 수가 없다.

어느 누구 난민들이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모습을 못 본 척 할 사람이 있겠는가? 마음 한구석에는 아픔이 컷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냉철해야 하기에 난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은 자유하다. 슬프면 눈물을 흘리고, 불쌍하면 도와주고 싶다. 더욱이 어린아이가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에 엎어져 죽은 그 모습을 볼 때 가슴에 눈물이 떨어지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시민들이 가슴을 열었다. 드디어는 영국도 독일도 난민을 받겠다고 나섰다. 지중해의 망망한 대해에 난민선의 비참한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한두번 보도 되었겠는가? 아마 하루에 한두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인들의 가슴을 치지 못했을까? 그것은 불쌍한 어른들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난관도 자기가 선택하여 겪고 있는 난민생활이다. 시리아에서 견딜 수 없어 나온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선택해서 난민이 되었다. 어떤 젊은 난민은 독일에서 지병을 고치기 위해 난민의 대열에 나선 사람도 있다.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나선 난민도 있다. 더러는 자기의 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난민이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어린 아이는 다르다. 자기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난민이 된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서는 자기 스스로 생존할 수도 없다. 나약하고 연하고 순진하고 예쁘다. 아름답기도 하다. 한 아이의 죽음은 인간의 가장 깊이 숨기어진 휴머니즘을 되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한 어린이의 죽음의 사실을 여기자의 따뜻한 가슴에 의한 필드를 통하여 본 모습을 찍어 온 세계에 뿌려 유럽인의 차가운 이기심의 벽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영국이나 독일 그리고 유럽의 각 나라가 난민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책결의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와 정치력의 씨름과 암벽 같은 법을 깨어야만 비로소 난민이 받아지게 될 것이다. 그 걸리는 시간은 얼마이겠는가? 아마 몇 해가 걸린 런지 알 수 없는 미제의 사건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안쓰러운 죽음이 이기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긴다. 물리적인 이치이다. 그러나 정신적 세계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긴다는 이치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윤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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