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칼럼]

[부천신문] 6.25 한국 전쟁을 세계인들이 보며 전쟁 후에 있을 정신적 후유증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아무런 사회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 기적 같은 현상을 보며 세계보건기구의 전문가들이 한국을 찾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정신 건강의 원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햇빛이 작렬하는 한낮, 시골 5일장이 열렸다. 어머니들은 머리위에 가득이 짐을 이고, 그리고 등에는 아들이 업혀 있었다. 어머니가 걷고 있을 때 아기의 머리는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잠을 자고 있었다. 등에 업힌 아이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캥거루였다.

캥거루는 자기의 아랫배에 새끼를 담고 다니지만, 한국의 어머니는 등에 업고, 가슴에 안고, 젖을 먹이고, 팔 베게 하여 잠을 재운다.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 어머니의 안전한 등, 어머니의 편한 팔에 온몸으로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에게 아낌없이 전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도가니 안에서 정신적 질환이라든가, 정서적 불안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고3 학생들은 수능 시험에 대비하여 가히 생명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나 가릴 것이 없다. 지칠 대로 지치고, 누적된 피로로 개운하게 깨어서 학교에 가는 때가 없다고 한다. 얼마나 안쓰러운가? 이 딸이 이렇게 고생을 하여 대학에 입학하여 4년의 학문을 마치고 결혼을 하라고 강요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고생 고생하여 대학을 나와서 나름대로의 자기 전문성도 생겨났고, 꿈도 있는데, 누가 모든 것을 접고 결혼하여 육아에 집중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결국 직장이나 더 나은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서 진학을 하거나 유학을 간다. 결국 사회적으로 VIP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바로 모성이다. 세계 사회의 긴박한 경쟁에 열중하다 보니 육아를 감당 할 수 있는 정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육아”의 정서란 생명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이다. 그리고 또 다른 자기인 자녀를 위한 희생이다.

그런데 자기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나름의 꿈을 이루다 보면 가슴은 차가워지고 온몸도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충족을 위한 도구화가 되고 만다. 그리고 육아는 아이의 먹이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가정에서 자녀를 위하여 온 관심과 시간을 쏟아 붓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육아는 어머니 숨결, 눈빛 그리고 가슴과 끊임없는 어루만짐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육아는 아이의 온전한 섬김이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사회적으로는 전문가이고, 긴요한 인물이며, 유능한 인재 일 것이다. 그러나 아기의 어머니로는 초보적 지식도 부족하다. 한국적 은유대로 표현하면 “아이가 어머니에게 딱 붙지 않는다.” 그렇다.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기면 짧은 치마는 아기를 푸근히 감쌀만한 보금자리가 되지 못한다. 화장한 얼굴에서는 어머니의 민낯으로 느낄 수 있는 입맞춤과 볼 부빔 그리고 어머니의 이마에 문질러지는 그 싱그러운 사랑의 느낌이 아이에게 감지될까?

유모차에 아이가 누워있다. 어머니는 유모차를 끈다. 유모차 바퀴의 울림과  어머니의 등에 업혀 어머니가 걷는 그 울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보다 더 크다. 아침이면 차가운 이별이다. 직장으로 향하는 어머니는 갑자기 일꾼으로 변신하여 등을 돌리고 가 버린다. 보육시설에 있는 아이는 과연 어머니 등에 업혀서 밭을 매고, 물동이를 이고, 물을 깃고, 부엌에서 밥을 짓고, 어머니와 하나 된 그 시절의 어린이와는 정신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로서 살아갈 것인가?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한 여성으로 살아갈 것인가?”라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자기의 꿈을 이루고 살아갈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자란 자녀 역시 자기를 그렇게 키워 준 부모님을 닮아 자라가게 될 것이다.

시대는 물질중심의 시대로 눈부시게 변화하고 있다. 아마 곧 육아를 로봇이 맡아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즈음 어머니 없이 사람다운 사람을 양육할 수 있을까? 결국 어머니가 희귀해지면 사람다운 사람도 희귀해진다. 로봇을 어머니처럼 따라 다닐 내일의 어린이를 상상하며 희귀 동물을 보호하듯 희귀한 어머니를 희귀하지 않게 하는 방도가 조속이 강구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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