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권 박사의 도강칼럼⑱

[부천신문] 누구든지 위의 그림을 보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소로 밭을 갈고 있다!”고. 

그 외에 더 할 말은 없을까? 밭가는 사람 머리 위에 떠 있는 해와 달 사이로 두루미가 날아간다. 이것이 허위적이고 작위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의 한가위 명절 아침 해 뜰 무렵에 이 광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으로는 이것이 우리에게는 수확기를 알리는 신호이지만, 이집트지역에는 경작기를 알리는 신호이다. 하지만 이집트학자들은 이것을 “아득한 먼 옛날”이라 해석한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들지만,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은 소로 밭을 갈았다!”고 해석하겠다. 그리고 작물 배경을 추가해서 말하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은 작물을 키우기 위해 소로 밭을 갈았다!”가 된다.

그리고 지혜의 눈 우자(oudja;)를 추가해서 말을 해보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은 작물을 키우기 위해 ‘지혜롭게’ 우경농작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해석에서 빠진 부분은 작은 상형문자의 글귀다. “오지리스(Osiris)신이 물을 정화시킨 것과 같은 깨달음을 기록한다. 영원한 깨달음의 경지를 전한다. 마트(Maat)적 진리의 평결 속에서 토트의 지혜가 찾아온다!” 약간의 의역이 있음을 감안할지라도, 독자들이 납득 못하는 것은 우리가 추론한 큰 그림의 글귀와 작은 상형문자의 글귀 사이의 아귀를 못 맞추었기 때문이다. 어디부터 그 아귀를 맞출까? 혹시 그것을 맞추는 과정이 깨달음을 낳는 지혜는 아닐까?

위의 그림 속에서 지혜는 크게 두 종류의 지성(intelligence)과 관계한다. 우선, 큰 그림의 글귀에서 볼 수 있는 지혜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 혼자 두 마리의 황소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은 목적을 위해 도구를 활용하는 실천적 지성을 표상한다. 그리고 밭가는 광경에 내포된 지혜는, 직관과 심리적인 감각과는 다르게, 비율적이고 개념적인 대뇌활동에서 만들어진 농지를 구획하는 이론적 지성이다.

그 구획에는 우자()처럼 분수(1/2,1/4,1/8,1/16,1/32,1/64)가 사용된다. 그 미세한 비율의 변화를 마음에 투영하여 자연현상의 차이를 찾을 수 있다면, “개념적 사고”가 열린다. 개념적 사고는, 수학자 프레게(Frege)가 말했듯이, 대상에 대한 관념이나 심리적인 현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연관된 명제에 대한 진술”에서 나온다. 

만일 우리가 “비율에 따른 개념적 사고”를, 타자와의 관계를 목적용 수단으로 상정하는 대뇌적 지성(ais;)과는 다른 종류의 지성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즉 심장의 지성(sia;)과 접합하여 사고한다면, 우리는 공기의 신 슈()와 수호의 신 이지스()가 관장하는 어떤 “깨달음”을 체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심장의 지성은 비율에 따른 개념적 사고에 생명과 연관된 신비를 만드는 마트(Maat)의 잣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현상은 타자와의 관계를 도구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어 영생을 만드는 “오지리시(Osiris)의 신비”와 연관된다.  

오지리스가 물을 정화시켰다는 말은 이지스()의 관장 속에 식물들이 소생하는 땅으로 거듭 낳았다는 말이자 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에도 적용된다. 갈증이 나면 물을 먹어야 갈증이 해소된다. 하지만 오지리스의 법칙을 등록하는 방식에 따라 뇌의 지성과 심장의 지성으로 나뉜다.

뇌의 지성은 몸의 욕망체계 그 자체에 맞게 기억하고 등록시키는 반면, 심장의 지성은 그것과는 반대로 등록하고 기억한다.

가령 내가 물을 먹으면 나는 살지만 타자는 죽는다는 것으로써 등록하고 기억한다. 심장의 지성에는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 등록되고 기억된다. 그래서 마음의 밭을 간다는 것은 나의 욕망을 뒤엎고 타자의 욕망을 반영하는 ‘관계에 대한 욕망’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타자와의 관계적 욕망을 투영시켜 자신의 욕망을 덜어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의할 것은 물질적 욕망의 탈피 속에서 물질 생산을 등한시하는 종교적 깨달음과 토트의 지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토트의 지혜란 물질 생산과 욕망 생산과의 화해를 찾는 지혜이다. 왜냐하면 물질 생산이란 타자의 욕망을 개선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無의 욕망을 추구하는 염세적 깨달음은 또 다른 자아 욕망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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