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 칼럼]

[부천신문] 우리는 나를 우리 안에 포함시켜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가 많다.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다. 여러 형제의 아버지이시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우리 형제의 아버지도 맞다. 이상한 것은 하나 밖에 없는 독자라도 자기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로 부른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오랫동안 받아드리지 아니하였다. 농경사회에서의 대가족 문화는 나만의 삶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돕고, 서로가 함께 두레를 이루어야 농사를 할 수 있었고, 생존할 수 있었다.

우리에 녹아져서 나를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을 우리 속에 포함시켜 살아갔던 상부상조는 행복스러움인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할머니가 어머니 역할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삼촌이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가족 강점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사는데 있었다. 이러한 꾸준한 인간관계 중심의 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자신의 뜻보다는 관계가 원만해지기 위하여 자기 뜻을 양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보시대에는 오히려 우리라는 관념은 사라지고, 개인 즉 ‘나’의 계념이 강해졌다.

내가 절대 소중한 존재라면 타자, 그 자신도 절대 소중한 존재이다. 서로의 절대 소중함이 인정받자면 철저한 법 준수와 예의의 실천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의식이 지나치거나 지·정·의의 균형이 깨어진 사람과의 관계를 맺었다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현대에는 인격의 균형이 깨어진 사람들이 많다. 지나친 감성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IS의 테러가 세계인들을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생 폭력적 인간군이 발생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화된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절대적 윤리도 자기 잣대로 상대적 비판을 받는다. 자신이 절대적 가치와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다른 사람과 자기 사이에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상대를 아예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고,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다.

자기 자존감에 조금이나마 해를 주면 돌발적인 행위를 감행하는 것이 오늘의 인간상이다. IS만 격퇴하면 모든 세계가 평온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오이다. 극단적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인간과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내는 삶의 지혜가 긴급히 요구되는 것이다.

나만을 위해 살다보니 가정에서도 점점 자기의 이익을 획득하는 유익추구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부사이에도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한 체 폭력으로 살인하는 자도 있다. 그리고 이혼은 물론이고, 부부갈등 중 즉각 헤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자기를 위한 결혼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능의 풀이를 익명의 바다이자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통하여 자기의 뜻과 현재의 결정을 지지받고자 하고, 자기가 흡족치 않다 하더라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댓글(반응)을 근거로 하여 마치 합법적인 것처럼 자기주장을 끊임없이 펼쳐가는 것이다.

자신이 올린 글에 대해서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고, 전문인 사람의 권고는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불특정다수의 반응에 심사숙고 없는 단순한 ‘좋다(like)’가 아닌 즉흥적 반응을 보이는 네티즌들이 여론을 만들고 조장한다. 이러한 지지나 반응을 보고, 스스로 정의로우며 가장 옳은 판단을 할 것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어 과감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결혼이 필수가 될 수가 없고, 당연히 선택이며, 자녀의 생산이 결혼의 절대적 열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녀를 낳는다. 자녀가 자기에게 줄 부담(모성애로서의 희생)을 계산하며 자녀를 낳지 않는다.

지금은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부모에 대한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왜 부모를 섬겨야 하고, 효도를 해야 하는지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을 자기 의사 없이 태어나게 한 부모에게 원망을 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빛난다. 그리고 모래알 같다고 각(角, 자기 긍정의 치움)이 서 있다. 모래는 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응집력도 없다. 생명의 뿌리를 받아드릴 만한 따듯한 가슴이 없다. 잘게 부서진 모래는 바위이다. 무기물 같은 인간상들이 상실한 우리는 절대가치이다.

우리를 회복하지 못하면, 내가 나를 존재하게 할 수 없다. 네가 없는 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해체하면 나도, 우리도 공멸할 것이 뻔하다. 진행 중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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