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칼럼]

[부천신문]나라의 땅이 흔들린다. 흔치 않은 일이다. ‘정확한 예측’이 어렵고, 한다 해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뾰족한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땅 하면 돈으로 생각했던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는 이제 그 땅 안속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축구공이 가죽조각으로 이어져 만들어진 것처럼 판으로 끼워 맞추어진 지구 표면위에 모든 생명체가 올라서서 살고 있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암반 위에 살짝 덮여져 있는 흙만 보고 땅이라고 생각했고, 농사하는 사람들은 토질이 좋으냐 나쁘냐에만 관심 두고 살았다. 하지만 이번 지진으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진 안전지대라는 우리 땅에 대한 신뢰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충돌로 인한 지진이 철썩 같이 믿었던 우리 땅에 대한 신뢰가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웃나라 일본은 늘 지진 속에 산다. 그래서 지진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지식도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뛰어나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그 발생빈도가 적다.

삼국시대에 지진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지금 발생했다고 한다. 아마도 몇 백년 만에 찾아온 ‘공포’일 것이다. 지진을 두고 느끼는 느낌은 각자 다를 것이다. 조선시대 때의 우리 조상은 지진을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삼국시대 즉 신라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느꼈을까? 궁금하다.

우리는 이 지진을 그저 당황스럽고 두려운 자연현상으로 받아드리는 것 같다. 가장 신뢰하던 안전처인 집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되지 못한 것을 경험했으니 “어디가 안전할까?”라는 생각이 가장 앞섰을 것이다. 혹시 조선실록에는 어떻게 지진의 날을 기록하고 있었을까? 미루어 추론하건데 나랏님이 도마에 올랐을 것이다.

나랏님이 덕스럽지 못해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나랏님의 책임으로 돌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음이 나랏님의 부덕으로 간주되었고, 그 해결도 나랏님이 기우제를 드렸던 것을 보면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고대사회의 부족에서 출발한 족장의 권위가 권리의 기원이고 고대사회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권위를 가지려면 신과 인간의 중간 지대쯤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전통과 습관이 있어 조선시대나 신라시대에 지진에 대한 책임을 나랏님께 돌렸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안전처가 조기에 안전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원망들을 한다. 이는 나라 일을 책임진 분들에 대한 원망으로 볼 수도 있다. 천재지변은 사실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재난이다. 그러나 항상 천재지변이 있은 뒤에는 정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천재지변을 사후 평가할 때,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계속 반복할 뿐 완벽한 천재지변에 대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며, 이러한 자연의 힘을 사람으로써는 감히 맞설 수 없는 불가항력적 사태인 것이다. 지진하면 인류사에서는 폼페이의 지진을 항상 떠올린다. 폼페이의 유적을 발굴하고, 사람들에게 관광을 시키면서 그 유적에 나타난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낱낱이 볼 수 있어서 그 당시를 생생히 유추할 수 있다.

폼페이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향락주의에 치우쳐 있고, 성도덕 문란과 문명이 발달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무분별한 타락과 죄가 지진을 불러왔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을 보게 된다. 향락하고, 타락하는 중에 지진을 당했다라고 보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서구사회에서는 성서에 기록된 지진 사건 소돔과 고모라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이 보시고 성도덕이 타락하여 동성애까지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구체적 예로 ‘쓸 것을 제대로 쓰지 않고 있다’라고 표현하면서 성(性)을 대를 잇는 성(거룩한 성) 또는 사랑의 관계 표현으로 행치 않고 환락과 쾌락의 수단으로서의 성(性)을 오용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죄악성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가치와 교훈을 가르쳐야 하는 하나님의 가정에까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서 동성애를 즐기자고 강요하는 장면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삶의 도덕성은 어떠한지 지금의 한반도에 지진이 꼭 그 이유에서는 아니겠지만, 성서의 기준이 지금 동일하다고 하지 않더라도 한번쯤 땅이 흔들리는 날 우리의 삶의 윤리를 되돌아보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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