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칼럼]

[부천신문]집 밖에서 수선스럽게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그리고 아이가 우는 소리가 담 안으로 들린다. 대청마루에 책을 보던 맏형이 뛰어나가려고 한다.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 벌써 앞마당에 내려 서 계셨다.

맏이를 다시 대청마루로 올라가 공부하게 하고, 싸리문을 나선 어머니는 한참 싸움질을 하는 둘째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갈긴다. 자신의 자식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둘째 아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하루도 어김없이 달걀 한 알씩 식구들 몰래 먹여오던 터였다. 그런데 얼굴은 할퀴어져 있고, 코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자기 자식의 뺨을 치고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는가? 그리고 둘째와 같이 싸우던 아이도 코피가 나고 있다. 자기 아들 코피는 나는 대로 두고, 남의 아이 코피는 앞치마를 젖혀 안쪽 면으로 먼저 닦아 주고 있다.

그 때 싸우던 아이의 어머니도 쫓아 나왔다.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싸우길래...’하면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회초리로 둘째의 종아리를 때린다. 아프다고 악을 쓰는 소리가 온 동네에 다 들린다. 그 이후 찬 물 한 그릇을 마시우고 코피 난 얼굴을 씻기고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렇게 꾸짖는다.

‘네가 그 아이하고 싸울 상대가 되냐? 어르신들도 생각해야지! 할아버지가 누구시냐? 양반이시지 않느냐? 동네에서 행패를 부려서 집안 욕보일 일이 무엇이 있느냐? 져야지’ 자기 자식을 데리고 들어가 다시 매질을 하여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게 한 다음 이렇게 꾸짖으며 자부심을 일깨워 주는 연유가 무엇일까?

싸운 집 아이와 부모들의 마음에 섭섭함이 있으면 풀어주고, 자기 자식 부모가 단속 못함을 죄송스럽다고 사과하고, 싸운 상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자식이 철이 없음을 널리 사과하는 뜻에서 자기 자녀에게 애꿎은 매질을 했던 것이다.

사랑방에 할아버지가 계신다. 밖을 내다보시지도 않는다.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무관심해서였을까? 아니다. 별스러운 것을 다 생각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다만 다음에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싸우고, 맞고, 억울해서 씩씩대는 손자에게 날달걀을 풀어 참기름과 소금을 담은 접시를 건넨다. 어머니는 안방에서 나가시고 만다. 그리고 전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시던 일을 계속 하신다.

아이는 조용하다. 잠이 든 것이다. 저녁상을 물리시고,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오늘 싸운 손자를 부르신다. ‘이놈아! 때린 놈은 다리를 펴고 자지 못하고, 맞은 놈은 다리를 쭉 펴고 자는 거야. 싸우기는 왜 싸워. 말로 하고 말지.’ 하시면서 벽장문을 여시고, 오징어 한 마리, 대추 다섯 알을 내어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신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싸우면 못 써. 사이좋게 놀아야지. 너는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잘생기고, 마음도 순하고, 그런데 왜 싸웠어? 모범생이 다른 사람과 싸우면 되나. 이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싸우지 말거라.’라고 타이르신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내가 가서 너와 싸운 아이 할아버지하고 바둑 한 판 두고 올게. 백방을 이기고 와 줄테니 그리 알아라. 그 영감탱이 오늘 밤에 잠 못 자게 말이다.’라고 하신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문 밖으로 나가신다. 붉은 황토 흙 마당에 내려선 할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은 그리도 평화스러운지 오늘따라 그 평화의 깃발인 할아버지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어른은 분명히 계신다. 그러나 역할이 보이지 아니한 듯하다. 하지만 먼 미래를 위해서 아이의 정체감을 살려주고, 정의롭게 싸우기를 격려하면서 반드시 정의는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싸운 상대 할아버지에게 바둑으로 승리를 하고 오겠다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삶이란, ‘싸움’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흙 속에도 미생물의 싸움은 거칠게 벌어지고 있고, 얌전하게 꽃을 피우고 있는 야생화들도 끈질긴 싸움의 승리로 꽃빛을 발산하고 있다. 곤충에서 야수까지 싸우지 아니하고 살아 있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아예 ‘인간은 싸우는 존재’라고 대놓고 선언하고 있다. ‘무한경쟁’이라고 하지 않는가? 국민이 자기 주권을 위임해 준 청지기인 정치인들이 주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유익만 추구할 때 분노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다반사이다.

그러나 한 가정이나 한 나라나 지구촌까지 통틀어서 어른의 직책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 그들은 이 경쟁에서 비켜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승자든 패자든 싸운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준비하고, 가르치고, 싸움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싸움판에 나선 어른은 어른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어른에 목말라하고 있다. 사랑방이 비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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