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칼럼]

[부천신문]농경사회이던 시절 겨울이면 농한기였다. 그러나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기간이었다. 열심히 땔감을 마련하고, 다음해 농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소모품들을 마련하는 준비기간으로 바쁜 기간이었다.

농번기로 바빠서 뒤로 미뤄두었던 일들을 챙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필요한 돗자리며 심지어는 농기구를 수리하는 일까지. 눈은 쌓여 이웃 마을을 오갈 수 없을 정도로 차단된 공간에서도 쉼 없이 다음해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할 거 없이 한 분도 빠짐없이 일을 하셨다.

이 때, 딱히 예술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술품 버금가는 정도의 것으로 인정받는 실생활의 작품들이 많이 발견된다. 그 예가 바로 누구든지 손쉽게 만들었던 조각보였다.

농경사회는 옷을 짓는 옷감도 흔치 아니하였다. 명주나 무명, 삼베, 광목 등 소수였다. 그런데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양한 옷감이 밀려 들어왔다. 할머니는 색색가지의 실을 준비한다. 그리고 눈이 어두워 손자들에게 미리 부탁하여 바늘귀에 실을 꿰어 둔다. 그리고 사방이 잠든 조용한 밤, 조각보를 짓기 시작한다.

여름에 입었던 삼베 옷, 그리고 이부자리로 사용하던 무명천, 오래되어 입어 헤어진 명주 천들, 가지가지 색색의 천들을 뭉쳐 놓은 묶음을 푼다. 그리고 하나하나 꿰매기 시작한다. 흰색, 노란색, 검은색, 보라색, 그 색깔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리 고심하거나 미리 디자인을 하시지도 아니하신다. 즉흥적으로 천을 자르고, 천과 천 사이를 바느질로 이어 가시는 것이다. 마치 세계 민족의 깃발들을 모아놓은 듯한 모양의 보자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채도도 별로 신경 쓰시지 아니하는 것 같다. 명도에도 관심이 없다. 천의 두께와 질감 역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하루 밤이면 조각보자기 하나를 훌륭히 만들어졌다. 색의 조화로움이나 전문디자이너적 평가를 뒤로하고, 여러 가지 잡동사니 물건들을 모아서 보자기에 쌓아서 시렁 위에 덩그러히 올려놓으면 그저 이것으로 족한 것이다.

각종 색감, 질감들로 짜여졌고, 서로 다른 모양이 이마를 서로 맞대어 꿰매어져 하나의 보자기가 된 것을 보면서 다양한 색과 질감을 하나의 보자기로 만듦으로서 그 조화와 균형은 세계적 미술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보자기가 되기 전만 하더라도 서로 떨어져 있고, 내팽개쳐 있을 때는 쓰레기에 불과했던 조화로움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궁이에 던져져 태워져야 할 것들이 할머니 손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다양한 색의 향연, 그리고 서로서로 조합을 이루는 천연적 신기를 이룬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개개인 삶의 패턴을 보면 놀라우리만큼 특이하고 다양하다. 특별히 개인의 인격이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보니 서로의 조화와 질서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다. 서로의 불협화음만이 생겨나는 것 같다. 이젠 혼자 식당에서 밥을 시켜먹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일상이 되었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차를 마시는 것도 보편화 되었다. SNS상에서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익명성을 누리며 나름의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어 놓는다.

자기의 의사는 끝까지 주장하고, 한 마디도 양보하지 않고 자기의 뜻은 뚜렷하게 밝히면서 개성대로 사는 사회가 된 것을 사회발전으로 보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이고, 다양한 개성과 뜻, 자기를 분명히 밝히는 사회는 어느새 모래 알 같이 하나된 조합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다.

조각보처럼 서로 다름이 만나고, 차이가 융합이 되는 개성들이 조합을 이루면서 전혀 다른 개성이 화합하여 또 다른 새로운 하나 됨의 어울림을 창조하는 조각보와 같은 사회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예전의 할머니 조각보가 그리워진다. 새로운 시대로의 할머니의 조각보를 만드는 길을 반추하며 새로운 방법을 채색해야 할 때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그 자체의 정체임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달라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의 정체성이다라고 존중해주며, 그 정체성이 절대가치만큼이나 소중하다고 인정해주고, 존중되는 사회로 가야하지 않을까? 또 하나는 서로 다르다고 해도 겹쳐져야 한다. 즉 만남과 연결이 필연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나로서의 존재감을 가지고 그 자리에 존재하고, 또 다른 존재는 그의 존재감을 가지고 존재해줄 때, 서로가 서로 겹쳐져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할머니의 방법처럼 차별을 하지 않는 조화에 순응해야 할 것만 같다. 할머니는 붉은색의 천에다 갑자기 보라색 천을 이어가기도 한다. 순간에는 너와 내가 맞지 않는다고 서로 부조화에 의한 배타성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것들이 하나라는 세계에 참여되다보면 가까이서 볼 땐 부조화처럼 보일 수 있더라도 가까이 보던 거리를 조금 떨어져서 보면 부조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성 없는 사회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작은 나이지만 큰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면 작은 것이 작은 것이 아니고, 이방스러움은 이방스러움이 아니다.

어느 리더가 온 국민을 조각보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온 국민을 한 보자기에 쌓아 꿈의 시렁에 올릴 지도자가 간곡히 바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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