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 목사칼럼]

[부천신문]신화(神話)는 이야기이다. 신화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연구할 이유도 필요도 요청되지 않는다. 그저 신화는 신화로서 만족된다.

단군신화도 마찬가지이다. 단군신화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아니 연구할 이유가 있을까? 한 민족 발원의 이야기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던 그 발원의 이야기가 없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신화 안에 담긴 정신이 그 민족의 인격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자.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땅이라고 주장한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토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의 현실은 이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질 땅으로 준비된 공의(公儀)로 남겨진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미 다수의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심지어 정착민들은 그들의 문화를 이루며, 문명을 만들고 살아가던 땅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그 땅을 주었다고 믿고, 그 땅을 자신들의 국토로 여기고,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다. 신화에 의한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어느 설날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둘러앉게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잉어고기를 먹지 않는단다. 옛날 고려시절 윤관 장군께서 다급히 강을 건너려고 하실 때, 교량도 없고, 배도 없는 상황에서 강 위를 뛰기 시작하셨는데 그 때, 잉어들이 모두 모여와 윤관 할아버지의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동화라고 해야 할까? 전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들은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들려진 이야기는 각각의 이야기가 되어 각자의 인생에서 재탄생된다. 어떤 손주는 이야기를 신비롭게 받아드린다. ‘우리 조상이 대단하긴 하구나. 그렇지 않고서 물고기들끼리 돕는 일이 생기겠는가?’ 생각하는 손주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손주는 ‘희망을 갖자’의 이야기로 받아드려 살다보면 맞게 된 위기를 돕는 손길이 있다는 희망의 이야기로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돕고, 협력하여 사는 세상으로 이해하고 이를 문학이나 미술, 그리고 음악으로 작품화하여 멋들어진 메시지로 세계인들에게 던져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과학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현존의 바탕 위에 살아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이 현존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학의 목적, 과학의 정신, 과학의 철학, 과학의 미학, 과학의 미래 등은 과학에서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샘에서 솟아나는 상상력과 현존과는 거리가 먼 상상의 세계가 우리에게 전해 주는 무한한 메시지들로 하여금 생겨나는 것이다.

설은 온 가족이 모인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이 모인다. 손자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는 벌써 60년을 넘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대화가 될 수 없는 것 같고,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소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러지만도 않다. 할아버지는 역사적 책임이 있다.

조상들로 전해 받은 지난날의 가문의 역사를 전달해야할 마땅한 책임이 있다. 정신적 뿌리가 없는 아이로 자라가게 할 것이 아니라 뿌리가 있는, 역사성이 있는 인격으로 자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자존감을 만든다. 나는 어느 우주에서 우연히 생성한 존재가 아니다. 나 하나를 위해서 수많은 조상들의 희생과 상황과의 투쟁과 그리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온 그 열매임을 스스로 인식하게 할 때, 그 자신이 그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으로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수십 대(代)를 내려오며 숱한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 자신이 자신 되게 만들어 주신 조상의 내력을 듣는 순간 그는 더욱 소중한 자아에 대한 확립을 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가 분명할 때, 어떤 어려움이나 어떤 난관이 닥쳐왔을 때, 그의 정신적인 힘은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갈 수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명절이 오면 조상에 대한 제사를 드리며, 온 집안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면서 흩어져 살았던 삶의 안부를 묻고, 예기치 못한 어려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 몰랐던 기적 같은 삶의 이야기도 서로 나누며, 생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가문의 얼을 심어주었다.

명문가문마다 전통적 정신사(精神史)가 있다. 그리고 출중한 조상이 계셨다. 사실 인생이란 조상의 DNA를 그대로 전수받아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나의 조상이 먹고 싶었던 것이고, 내가 향유하고 싶은 것도 조상이 향유하고 싶은 것을 향유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조상의 DNA가 내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의 DNA를 살아드리는 것이 나의 삶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신적인 영역도 역시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유산으로 인해 그의 정신세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설은 모여서 인사하고, 세뱃돈을 챙기는 절기가 아니다. 정신적인 가치를 일깨워주고, 전통문화와 후손들에게 정체감을 바르게 정립해주는 가문의 생성과 융성의 기틀을 마련해주는 계기로 삼아야 할 중요한 절기인 것이다. 신화가 없는 가문, 역사가 없는 가문은 언젠가 부평초처럼 한 시대의 부유물로 떠돌 뿐이다. 조상이여, 전설이 되어라. 조상의 삶이 후손의 희망 태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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