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신문]진달래, 개나리, 이름 모를 꽃들은 온 산천에 지천인데 노래하는 봄처녀는 아직 오지 않는다. 쑥과 냉이를 캐기 위해 산천 여기저기 바구니와 호미를 쥐고 옷고름 날리고 치맛자락을 산들거리며 나물을 캐어 바구니에 담고 꽃잎을 따 입에 물고 꽃가지 꺾어 머리에 꽂는 봄처녀들이 보이지 않는다. 온 산천을 붉게 물들이는 이름 모를 꽃들이 아무리 많이 피어 지천이라도 인적이 끊긴 산화(山花)는 그저 외롭고 쓸쓸하며 공허해 보이기까지 한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이 이리도 그리울까? 사람이 없다. 저마다 내가 적격이다. 외치고 있건만 마치 산천에 지천인 봄꽃처럼 저마다 자기의 색깔을 내고 소란스럽게 외치고 있을 뿐 동구 밖에서 철 가위로 쟁그랑 쟁그랑 소리를 내며 수레에 엿 바구니를 메고 들어오는 엿 장수 아저씨보다 반갑지 않다. 가위질은 열심히 하지만 엿 바구니에 엿을 얼마나 담겨 있으며, 엿 맛은 어쩐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람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같은 우리에서 밥을 먹다가 뛰쳐나와 서로 엉키어서 뒹굴던 가족을 비판하던 사람이 가위질을 열심히 하고 있다. 아직 대법원 판결나지 않은 기결수도 가위를 치고 있고, 북한에 사사건건 결재 받고 의사결정을 하던 붉은 가슴을 한 이도 가위를 치고 있고,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기업인도 가위를 치고 있다.

한 나라를 섬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엿장수 엿 팔 듯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고물 가져오면 대충 보고 아이들 눈 속이는 식의 거래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젠 간접 민주주의에 맡겨놓고 의정보고만 받고 가만히 있을 국민도 없다.

여기를 뒤지고, 저기를 뒤지고, 정보망을 이용하여 자기 나름의 나랏일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해 온 것이다. 진실로 ‘아 저분’이라고 감탄사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만다. 처음에는 감탄을 했던 분들도 나중에는 실망을 준다. 처음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국부(國父)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어느 날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선언 이후 부인과 망명을 떠났다. 한 세월 하와이에서 쓸쓸이 노년을 보냈다. 그래도 그 때는 망명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인정스러운 모습이었다.

지금의 인심은 망명을 생각지도 않는 사람을 출국금지 시키자고 먼저 투망을 치는 것이 언론이다. 잘 살아보자고 외치던 군부 독재의 출연처럼 1차 대전의 패전으로 전상 보상금에 허덕이는 국민에게 언제까지 노예생활을 하겠느냐고 차라리 쟁기를 버리고 총을 들자고 외치던 포퓰리즘의 히틀러처럼 정복을 꿈꾸며 대중에게 외치는 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잠시 과거를 돌아볼까? 그토록 정의를 외치던 전문 정치인도 결국 부정축재로 구속이 되어버렸고, 일상을 민족투사로 살아온 분도 그 자녀들의 불명예로 그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엿 장수를 해본 아저씨가 없다. 요란하게 가위 소리만 낼 뿐 장사를 해보지 못하고 끝이 났으니 얼굴을 담 넘어 내밀고 나는 잘해보겠다고 가위질을 하지만 못내 신뢰가 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실망과 실망이 쌓인 탓일까? 미국은 트럼프가 트럼프를 치듯 놀이 정치를 하고 있고, 시진핑은 명나라 왕이 된 줄로 착각을 하고 천하 통일을 꿈꾸고 있다. 그의 얼굴을 보다 보면 교만으로 가득차 보인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우리며 옅은 웃음을 칠 때는 모사꾼이 역력하다.

푸틴도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는가? 시베리아 여우이다. 아베는 가미가제의 큰 형 같지 않는가? 이 희대의 자칭 영웅들을 앞에 앉히고 한판 승부를 해야 하는 선수를 세워야 한다. 그래도 1950년 이후에 격동은 있었으나 침몰한 바는 없다. 이젠 침몰할 수도 있는 험난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어느 시민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4월이 그리 범상치 않다. 이젠 봄나물 캐는 처녀처럼 사뿐히 냉이, 쑥만 골라 소리 없이 한 바구니 채워가는 공손한 봄처녀가 필요하다. 봄꽃은 지천인데 봄처녀가 보이지 않는다. 탄핵이 탄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소곳한 자태의 머슴을 바라고 있다.

저작권자 © 부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