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겨울이다. 제법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뭇가지는 앙상해 보이지만 마치 화가 앞에 훌훌이 옷을 벗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몸을 내어 보이는 모델처럼 나무의 가지는 훌훌히 벗고 나상(裸像)을 보여주고 있다.

숲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꽃에 비길 바가 못 된다.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꽃과 잎은 서양화의 걸맞은 소재라고 한다면 나무 가지는 동양화에 걸맞은 그림감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파아란 차디찬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 나간 가지 선은 신비스럽기까지 한 아름다움이다. 가지선마다 서로의 조화와 질서, 그리고 맨 끝 가지의 마침의 고요함, 나무의 참 진가는 겨울나무에서 맛볼 수 있다.

저렇게 가늘고 앙상해 보이는 몸에 잎을 달고, 꽃을 달고, 열매를 달아 천연색의 향연을 피우기도 하고, 온갖 새와 동물들과 미물들에게 보금자리로 제공하여 주고 먹거리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는 그 숭고한 희생정신이 사람보다 낫다라는 생각을 자아내게 한다.

사진으로도 그의 진실을 묘사할 수도 없고, 화가의 예기(藝妓)로도 그의 나무의 마음을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빌딩 숲을 걸어가다 보면, 사람을 압도하는 높이와 크기를 만난다. 화려한 외장의 기하학적이며, 건축가의 기술과 정신이 어우러져 세워진 고층 사이를 걷다보면 빌딩숲에서 이방인이 되는 듯한 생각에 잠긴다.

숱한 문(門)은 있다. 그러나 들어갈 수가 없다. 통과의례를 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문은 있되 모두가 잠겨 있다. 들어가 본들 나와 무슨 상관이랴? 내겐 유익하게 사용할 권리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건축의 발달로 빌딩의 키는 점점 자라고 있다. 그리고 화려해지면서 디자인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이럴수록 사람들은 점차 거대한 인공물 앞에 왜소감을 느낀다. 너무 화려하여 초라해지고, 거구라서 나약해지며, 완벽함에 부족해져 주눅이 든다. 오히려 대형건물 앞에서는 위압감마저 들게 되고, 그 빌딩을 마음껏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 괜스레 상대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건물의 외장을 모두 벗겨보자. 무표정한 철빔으로 구조된 것을 볼 수 있다. 나무로 말하면 가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차디차다. 철(鐵)이 주는 냉혹감과 지나치게 당당하여 위협을 느끼는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촘촘히 박아 놓은 굵은 나사못, 마치 자유를 억제시키고 해방이 두려워 얽매어 놓은 강제 장치이다. 노예상이 끌고 온 팔려갈 노예처럼 묶이어 억지로 힘의 균형을 잡기 위해 피나는 합체를 위해 한숨과 비명과 무언의 절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범선에 노예로 끌려 들어가 엔진 대신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젓는 노예의 집합체 같은 구조물들을 생각하면 나무와 너무나도 다른 질서이다. 나무숲을 가보라. 어머나라고 부르고 싶은 초록색 가슴을 열고 휘영청 늘어진 가지는 아무에게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포근히 안아준다.

나무의 지체는 생명과 사랑과 자유로 서로가 서로를 포용해준다. 잎이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 뿌리까지 전해주면 가지는 그늘을 지게 해 주어 숲속을 지나는 모두에게 그늘이 되어준다.

어린 시절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은 신기하고 즐거운 놀이였다. 다른 세상에로 이사온 기분이었다. 옆으로 팔을 벌린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타다보면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람을 타고 허공을 여행하기도 한다.

나뭇가지는 말없이 찢어질 때까지 참고 견뎌주던 그네, 그 나뭇가지가 이 나이가 되어 미안하고 죄송하면서 그리움이 그지없다. 나무의 가슴은 항상 배려와 섬김, 그리고 넉넉함으로 우피 곁에 생시(生時)부터 사시(死時)까지 한 번도 외면하거나 배신하지 아니한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이, 나무가 그러하고, 산이 그러하고, 하늘이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의 뜻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져야 행복한 환경이 조성된다는 망상에 갇혀 인공적 제조만을 추구한다.

지난날의 역사(잘못인지 아닌지는 그 시대에 그 사람이 되어봐야 안다)를 지금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뜻대로 디자인하고, 만들기 위해 철빔을 절개하고, 그것들을 설계대로 구멍을 내고, 보트로, 너트로 조여가는 공사는 과거를 현재 자기 뜻대로 재단하고, 정리하고, 폐기하며, 청산하고 적대시 하는 것과 같다.

역사를 건축하듯 할 것인가? 숲을 가꾸듯 할 것인가? 지난해에 뻗은 가지는 그 해를 지나는 나무의 생명을 건 최선의 산물이다. 못 생기고, 흉물처럼 보이는 뿌리는 토질과 그 성장 시기의 환경에 처절히 대항하여 물을 나무 꼭대기까지 공급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의 표이다.

숲 같은 나라에서 살고 싶다. 건축하듯 하는 나라는 지나치게 잔인하기만 하듯 해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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