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대영 목사

[부천신문]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생명을 거는 걸까? 시각을 조금만 넓히면 삶의 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명을 담보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의 가치에 대하여 까지 회의를 느낀다.

우리 지역사회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칠년여년전 아파트 리모델링을 하자는 측과 리모델링을 반대하는 측이 첨예하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반대 측은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많고, 추진하는 파는 젊고 이주해온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다.

리모델링을 하면 33평에서 47평으로 평수가 늘어나고, 그 당시 아파트 시세로 삼억대에서 칠억대로 인상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격렬하게 부딪칠 때는 낫을 들고 나올 정도로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을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격렬히 주장하는 자들은 반대했던 분들에게 감사해야 할 현실이 되었다.

지금은 대형아파트는 값이 많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매매도 원활치 않다. 그러나 중형(33평) 아파트는 매매도 잘되고, 상승하였다. 지식인들이 제시한 삶의 방법론인 이데올로기는 그저 삶의 방법론일 뿐이다. 이 일로 생명을 걸고 싸울만한 가치가 없다.

지금은 1950년 한국전쟁을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왜 전쟁을 했을까? 그 끔찍한 희생을 강행하면서 왜 동족끼리 싸웠을까? 잘 싸웠다는 사람도 있지만, 전쟁은 인류에게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크게는 남북간에 싸우고 있다. 작게는 개인과 개인끼리도 싸우고 있다.

‘분배’와 ‘성장’이라는 단순한 명제이다. 그러나 분배로 요긴한 삶의 방법론이고, 성장도 삶의 방법론이다. 그런데 왜 싸울까? 딸이 어머니에게 애절하게 부탁한다. 대학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타이른다. 오빠들이 다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 조금만 양보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딸은 배움의 기회란, 시간의 문제이다. 그래서 애절히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허락되지 아니하였다. 그 이후 이 딸은 배우가 되었고, 탤런트가 되었다. 지금 칠순이 넘었다. 그는 크게 성공했다. 그런데도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배움의 갈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후회 없다고 했다. 대학을 못간 아쉬움은 남으나 현재의 자기됨에 만족한다고 했다.

분배의 불공평이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형제인데 오빠는 대학을 진학시키고, 자기는 진학시키지 아니한 부모를 원망하고, 가출을 하여 분노했다면 그는 오늘이 있지 아니할 것이다. 인류사를 통 털어서 공평하게 분배된 역사는 결코 없다.

우리 조상들도 반상(班賞)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지주와 소작 사이의 소득 불균형, 그리고 산업사회에 있어서 수출주도형 경제 정책에 의한 노동자의 홀대는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성장위주의 결과 정책이 얼마나 많은 공평한 분배에 문제를 가져오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계급 없는 사회, 공동생산사회, 그리고 균등분배사회를 외친 맑시즘 역시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다.

구소련의 스탈린은 자국 노동자 칠천 만을 사살했다. 누구를 위한 혁명인가? 국가를 위한 공산혁명은 아니었다. 국가주의는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지배계급을 위한 혁명은 아니었다. 노동자를 위한 혁명을 위해서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아이러니한 역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은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민은 고통 중에 살고 있다. 굳이 재론할 필요 없다.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다. 종교교조 주의도 변했다. 지도자들의 의견을 들으면 일리가 있다. 조국 통일과 번영을 위한 혁명 중이라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 성장(先 成長)을 추진하고, 후 분배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오늘의 천리마 운동은 이밥(쌀밥)과 고기반찬을 인민에게 먹이기 위한 일시적 희생이므로 감내해야한다고 설득한다. 우리가 그토록 군사독재에 항거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시대 시대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

특히 다원주의 철학에서는 개인주의 사상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이 각기 다름이 조화를 이루어질 때, 행복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리더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질 때, 조화와 화목은 깨어지고, 서로 대결과 갈등으로 치닫는다. 리더는 전 공동체가 공감을 하고 지지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나 정책을 내어놓아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건강한 지도자가 될 수 없으며, 결국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권위를 상실하여 리더로서의 사명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리더는 화목의 직책이다. 온 공동체가 화목하게 하는 것이 리더이다. 지도자의 직책인 것이다.

화목이 깨어지면 아무리 타당한 일을 하더라도 따르는 자가 없다. 실패한 리더이다. 리더는 자기주장이나 철학이나 이데올로기로 이끌어 가려 하지 말고 국민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서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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