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새벽 일어나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아니하였단다. 대청마루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고 나니 희뿌옇게 앞이 분간되기 시작하더란다. 앞 감나무가 환갑, 진갑을 넘긴 터라 먼저 그 자태가 들어왔다. 그런데 생경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단다. 그 소리는 생존의 최후의 몸짓이라는 것은 조금 후에 알았단다.

감나무 상상 꼭대기에 매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매의 발목에 끈이 묶여 있다. 그리고 그 줄 끝에 젓가락 같은 나무 막대기가 달려 있는 것이다. 깨달았다. 집 매이다. 매 주인이 저 매를 키우면서 사냥도 하고, 호신용으로 매를 키운 것 같다. 매를 다스리기 위해 매의 발목에 끈을 묶어 두었다. 그리고 그 끝을 잡고 매를 다루기 힘들어 막대기를 묶어 놓은 것이다.

이 매가 주인 몰래 이른 새벽하늘을 날다가 그만 안개에 시야가 가리어 미쳐 뻗은 감나무 가지를 보지 못하고 고공을 날다가 끈이 감나무에 걸린 것이다. 그리고 끈을 잘라보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 더욱더 단단히 나뭇가지에 매어지게 된 것을 알았다. 저 매를 풀어줘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또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었다. 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지친 매를 보고 때마침 뱀 한 마리가 감나무 위로 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난관을 만나면 더 큰 난관이 오는가? 기구한 운명에 처한 상황이다. 조건을 보면 저 나무 꼭대기에 메어 있는 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같았다. 나무 끝에 메인 매는 뱀을 발견했다. 더욱더 힘을 내어 날개 짓을 해보지만 깃털만 날 뿐 도저히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지쳐만 갈 뿐이다. 뱀은 여유롭게 혀를 내두르며 오르고 있다.

자신만만하다. 이젠 매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좁혀서 정지를 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 매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일순간이다. 전광석화 같은 순간이다. 시간을 초월한 순간에 운명은 바뀌었다. 매가 공격하는 뱀의 눈을 부리로 찍고, 발톱으로 뱀의 머리를 움켜 쥔 것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시간만 흐른다.

뱀의 몸이 아래로 축 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는 뱀 한 마리를 하루 종일 뜯어 먹었다. 모두를 삼킨 황혼녘에 석양을 등지고, 마지막 나래 짓을 했다. 드디어 끈은 끊어졌다. 매는 하늘로 한없이 한없이 날아오른다. 하늘도, 감나무 가지도, 구름도, 황혼의 해도 고요하다. 위기를 극복하면 기회가 온다는 메시지는 전설이 되어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

주변을 보면 사는 것이 아니라 아우성이다. 저마다 위기를 맞고 있다. 가장 큰 위기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 됨을 상실하는 자아상실의 위기이다. 이런 격언도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란 말이다. 자아상실을 하고 나니 흐르는 세대에 시체처럼 흐물거리며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기이다. 아우성을 친다.

자신이 자신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 삶이 빈곤하든, 부하든, 건장하든, 병약하든, 무슨 상관일까?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들은 자기 정신으로 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고초나 괴로움, 자기 목숨을 상실하면서도 뜻깊게 살았다. 희열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나름의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정보에 미혹되어 미끼를 문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위기이다.

국민의 정신을 세우는 역사 교과서가 정권이 바뀌면 역사도 바뀌는 시대에 어찌 뿌리 있는 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누구로부터 바른 정신을 이어 받을 수 있을까? 인격이 형성되어지는 청소년의 의식구조를 자기 논리나 의도적 집단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일제가 강제로 지배하던 때의 한국인의 식민통치를 당하던 그 당시의 청소년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성(性)도 바꾸라. 말도 바꾸라.(한국말 쓰지 못한다.) 모든 역사도 바꾸어서 민족의 자존감도 무너뜨리는 역사 왜곡과 오로지 신민(臣民)으로 살게 하는데 목적을 두고 집요하게 교육했던 그 때보다 오히려 더 효율적인 의식화는 메스미디어와 정보전달 기술이 발전된 사회이므로 더 깊이, 더 넓게 각인 되어져 가고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만이 아니다. 실제 사회도 그러하다. ‘정죄하고 처단하는 사회’ 무섭다. 1940년대의 북쪽하늘, 어느 날 머슴의 눈동자에 살기가 돌았다. 팔에는 붉은 완장이 걸려있다. 그리고 사랑방으로 뛰어 들었다. 손에 든 죽창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주인으로 섬기던 주인의 가슴을 몇 번이고 찔렀다. 그리고 익숙히 알고 있는 장롱에서 토지문서를 들고 달아났다. 주인은 지금까지 갑(甲)질을 하고 살았다. 그래서 죄를 지었고, 정죄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을(乙)로서 착취당한 머슴은 박탈당한 지난날을 보상받아야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 논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온 천지가 이 사상으로, 이 이론이 그 정치에 등 떠밀려 소박하고, 인심 후하고, 예의 바르고, 고운 마음들이 서로 정죄하고,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다. 중국의 홍위대도 동일한 난동을 피운 바 있다. 이른 바 문화혁명이다. 언론이 정죄하고, 권력은 처벌하고, 여론몰이 그물치고 잡아 올리는 시대에 몰려가는 착한 마음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관용을 베풀고, 용서하고, 포용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남의 짐을 지고 스스로 고난당하는 은혜, 베풂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다. 설중매화(雪中梅花)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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