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역사를 이해하려는 자의 자리가 중요하다. 극단적인 비극은 전쟁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은 자신의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처참한 상황에서 의무를 수행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낯선 정글을 한 개 중대가 투입되어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탄에 전우가 쓰러진다. 그 다음부터는 이성을 잃어버린다. 사방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개시하게 된단다. 그 때, 민간이 있었다면 민간인이 죽었을 수도 있고, 어린이가 있었으면 어린이도 죽을 수 있다.

그 현장에서는 인권이라든지,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이라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눈이 뒤집힌다고도 표현하는 병사도 있었다. 막상 파병근무가 끝이 나고 일상으로 돌아와 회상해 보면 자신은 그 현장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무차별한 난사는 한낱 사건일 뿐, 아련히 떠오르는 망상이며 누구도 책임을 질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흔적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평온을 찾은 후에 그 때 일을 현재의 시대정신의 잣대로 하여 비판하면 살인마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동기도, 그 당시 상황도 모두 비인도적, 비인격적 행위로 비판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상황을 뛰어넘어 휴머니티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해야 함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다. 그러나 극단적 상황에 맞닥뜨려져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 누구든지 윤리의식은 사라지고, 생존 본능에 의하여 행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이 나면 전범들의 책임을 묻고 재판을 한다. 그러나 참전한 전 병사들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역사 이해는 사건 그 당시의 자리에서 이해함이 올곧은 판단이 아닐까? 지나간 역사를 현재의 자리에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성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늘 나뉘어져서 나라를 세운 경우가 많았다. 신라, 고구려, 백제가 나뉘어지듯이 지금도 원하든 원치 않든 나누어져 살아가고 있다. 같은 민족이라고 하나 나누어져 나라를 세우고, 서로 누가 통일할 것인가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삼국시대에 나당이 연합하여 백제와 전쟁을 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있다. 타국을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삼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매우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때 그 당시, 가장 힘이 약한 신라는 생존하느냐 못 하느냐의 극단적인 선택함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지 시각마다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은 한 형제이다. 생사를 다투는 겨룸이라면 생존하나만 생각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를 보자. 아버지적 마음으로 한 민족이 두 나라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이상론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적 의식을 가진 북녘의 인민공화국을 꿈꾸는 사람들과 남한 민주공화국을 꾸는 나라가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이해는 이데올로기는 삶의 한 방법론이며, 갈라져서는 안된다는 이상론을 펼치는 분들은 모두 죽었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남북한이 생겨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논하지 말고, 한민족이고, 한 나라가 되자 라는 이상론을 제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다. 누구도 거부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의 인민들의 삶과 남한의 국민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비판해보라. 월북자는 적으나 탈북자는 많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객관적 평가이다. 그런대도 현실을 외면한 체 이상론만 주장한다면 과연 유토피아처럼 이룩될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는가? 논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도 중요하다. 현실은 증거가 있고, 논리는 아직 증명되지 아니한 가설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라는 것은 지금 사는 우리의 판단의 몫일 것이다. 분배 속성도 좋은 삶의 방법이다. 성장 우선 주장도 좋은 이론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그리고 민주주의를 이룩한 세계의 기적이라고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선 성장 후 분배를 주장하는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이룬 모든 과정의 주인공을 무시하고, 정보사회에서 4차 산업시대로 돌입해 가야하는 미래도 중단하고, 오늘의 성장에서 만족하고, 분배를 시행한다면 미래도 없고, 과거로 비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모든 세워지는 것은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다. 탑을 보거나 건축물을 보거나 모든 것은 밑면이 없이 세워질 수 없다. 과거도 인정하고, 미래지향적일 때 성장과 분배의 두 성과의 과실을 다 추수할 날이 올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과거 역사 현장에서 이해하고, 미래는 미래의 자리에 미래를 깨우침이 발전과 선진을 가져오는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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