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1980년대 후반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선전하려고 평양에 봉수대교회와 장충 성당을 지었다. 교회나 성전 역시 한국 기독교와 천주교회가 건축대금을 부담하였다.

그 당시 북한을 방문했던 종교인들은 북한에도 교회가 있다고 말했고, 북한에 봄이 오고 있다고 긍정적인 말을 쏟아냈다. 이로 인하여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지원 사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연변과학 기술 대학건립 이후에 북한에도 과학기술대학을 열었다. 얼마 전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3사람 모두 기독교인들이고 한 사람은 연변과학대학교의 교수이고 한 사람은 평양과학 기술대학의 교수이다.

죄목은 간단했다. 국가정복 내란도모 혐의였다. 알고 보니 친한 친구에게 전도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한다. 그토록 경계하는 종교를 왜 평양이 교회와 성당을 건축하게 했을까? 그것은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외국인들이 예배처소가 있느냐 묻는 말에 ‘있다’라고 하고 싶어서 교회와 성당을 건축케 했던 것이다. 봉수대교회에는 우수한 즉, 공산주의 정신이 투철한 인민을 선발하여 예배에 가짜 기독교인을 위장하여 예배를 드리게 했고 목사 역시 당성분이 좋은 가짜 목사로 설교하게 했다. 아이러니컬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짜로 설교하고 가짜로 예배하던 교인들이 진짜로 점점 변해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전 북한 주영공사로 지낸 태영호 씨의 저작 3층 서기실 암호(기파랑)에 적고 있다. 세계에 고립됨을 막기 위해서 199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북을 추진하면서 교황청에서 진짜 신자를 데려오라고 했다고 한다.

북한은 대대적으로 조사해 6.25전쟁 이전 신자였던 할머니를 찾았다. 처음엔 두려워 완강히 부정하던 할머니는 결국 뒷담에 만든 예배당을 보여주며 ‘한번 마음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신다.’ 이 말을 듣고 김정일은 교황 초청을 접고 교회, 성당 건립도 중단했다고 쓰고 있다.

5만부가 단숨에 팔려나간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북한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알고 싶다는 것이다. 가려진 커튼의 틈새만 있어도 들여다보고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는 꾀 많은 남한 분들이 북한의 거짓 선전과 선동에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사람 죽기이기를 파리 목숨 같이하는 살인마 김정은이 미소를 띄우고 남한 TV에 등장하자 차기 통일 대통령으로 모시면 좋겠다는 여론도 있다고 하니 남한의 정보사회에서 자유를 누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북한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회담이란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인격과 인격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상대의 인격을 믿지 못하면 대화를 아무리 오래해도 이해와 신뢰까지 이루기가 어렵다. 회담은 평화를 위해서다. 평화의 필수조건은 정의이다.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이 남북전쟁을 개시할 때,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했다. 크나큰 내전이었다. 남군도, 북군도 모두 기독교를 믿는다. 하나님께 전쟁에 승리케 해달라고 기도하여 각각 신이 자기들 편이라고 믿고 싸웠다. 그러나 북군의 승리로 미국의 새로운 정신적 건국이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정

의가 있는 평화, 정의편이 승리하여 오늘의 미국이 존재한다. 평화는 쉽게 날아오는 파랑새가 아니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로만팍스(힘으로 압제 후 구가하는 평화)이거나 아니면 다시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전술전략으로서의 위장된 평화이다.

이러한 예는 세계 역사에서 얼마든지 있었던 사건이다. 정의가 우선되고 나면 자연스레 평화가 온다. 통일도 그렇다. 단순히 경제적 유익(자원 그리고 값싼 인건비)를 바라고 통일을 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정치적 통일은 통째로 바치는 제사와 같은 것이다.

충분한 변화를 추구하고, 두 남과 북이 인격적 성숙을 가져오고 인격적 신뢰가 이루어져진 다음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인격적 바탕 위에 통일이 가능하고, 사귐이 편하여 피차 격의 없는 교류가 가능한 것이다.

경제와 정치적인 통일은 극단적 빈곤과 상호간 소득 간격으로 인한 갈등만 심각해 질 수 있으며, 정치적 통일은 결국 분열의 분열을 가져야 원치 않는 내전도 불러올 수가 있다. 북한이 남한에 대한 공작은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공작은 반 성공했다고 본다.

공산주의 체제유지는 선전과 선동으로 한다. 미국이 선전과 선동의 대상으로 매우 부담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격이 신뢰되지 않는 회담은 성공 확률이 낮다는 것은 개인의 삶에서도 언제나 체험되는 것이다. 신의와 정의 없이는 북미대화는 희망봉이 보이지 않는다. 회담은 말 나누기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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