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칼럼] 뜻이 있어 세속을 버리고 구도의 길에 오르는 사람에게 속세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삭발은 신선하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머리카락이 미끄러져 내려오고 땅에 흩어진 것을 보는 본인의 감정은 어떠할까? 뜻을 세우게 된 동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평생을 그렇게 삭발을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절은 지나가야 할 것이다.

스님 제 머리 깎지 못하던 시절은 지났다. 안전 면도기가 있어 스스로 자기 자신의 두발(頭髮)을 깎는 스님들을 많이 보았다. 두발을 신성시하던 때가 있었다. 내 몸의 모든 지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서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해서 평생 두발을 깎지 않고 산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들이었다.

그래서 상투를 머리 위에 매어서 다녔다. 두발 관리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지켜온 조상들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고부터 단발령 즉, 머리를 서양식으로 깎도록 강요하였다.

그 당시 단발령에 반발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속세를 떠났으니 모든 욕심과 정욕을 내려놓고, 참선과 득도를 위한 고행의 길을 걸으면서 거추장스럽지 않게 삭발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성철 스님을 찾아간 부인이 딸을 보여 주면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으나 불필(不必)이라고 일갈하시고 법당으로 돌아갔다는 일설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딸 역시 스님이 되어 법명을 불필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한 번 뜻을 세운 이후 변치 않고 구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신부님도 결혼을 하시지 아니 하신다. 언제 독신 아니더라도 신부직을 수행하도록 하는 법이 바뀔런지는 미지수다. 딱히 성서가 성직자는 독신이어야 한다고 규정해 놓은 곳도 없다. 다만 사도 바울의 견해가 참조되고 있을 뿐이다.

성직이란 타자를 위해서 살아야 하므로 사적 사랑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 여겼고 정히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신부님들은 차선을 버리고 최선을 택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여 경험하지 않는 세계는 상상을 하게 되고 그 상상은 사실 이상이 될 수 있으므로 더욱 더 탐하고 싶은 욕구가 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오직 서품을 받을 때의 서약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헌신을 다짐하고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부님의 두발은 자유할 것 같다. 어느 날 신부님이 삭발을 한 모습을 본 바가 있다. 암투병중에 계신지 아니면 어떤 뜻을 세우고, 관철하실 계획인지 모르지만 삭발하신 신부님을 뵈올 때, 법복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라는 개인적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두발을 깎든지 깎지 않든지 계율에 없으니 그것은 신부님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말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일본을 가보면 스님이 머리도 길게 기르시고 결혼도 하신다.

하등에 결혼과 삭발을 하지 않음이 구도의 길에 장애가 없으신 모양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스님들의 삭발 모습을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종교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역할을 하는 분처럼 느껴졌다.

인간이 삶을 시작한 이래에 가장 먼저 한 행위가 신앙행위였다고 한다. 동굴 속에서 살던 사람이 벼락과 번개치고 소낙비가 내리면 공포심에서 동굴 밖으로 나아와 초월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행위를 들어서 말한다.

결국 종교가 인간의 삶의 영역의 한 역할을 해야 하는 분야이고 보면 나 자신의 뜻보다는 타자(불특정 다수)의 요청에 응하는 것 역시 자기 절제와 자기 부정, 그리고 희생이라고 생각되어 보통 사람과 다른 삶의 길을 걷는다고 존경해마지 아니한다.

스스로 한 시대에 함께 사는 이웃에 자기를 절제하는 삶은 다중(多衆)들에게 보여주는 경(經)내지는 도(道)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소비를 하고 타자(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삶을 살도록 본을 보이는 것은 최선의 가치 추구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보아진다.

이를 두고 자유(自由)라고 한다. 지고한 진리를 추구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자유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이 있다. 편하고 넓고 찰나적으로 유익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그 문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의 이름은 민주주의이다. 다수의 찬성으로 결의됨이 바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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