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우리 조상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 앞에 금줄을 달아 ‘이 집에는 신생아가 있습니다. 삼가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표시를 하고 전염병 등으로 부터 어리고 유약한 생명을 보호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신생아를 안아보려면 아이가 병원에서 예방주사를 맞고 난 후(기본 4~6주) 안아볼 수 있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우리 선조들은 연약한 신생아에게 전염병이 옮거나 작은병에도 아이를 잃어야 했기에 매일 매일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아기를 길렀다.
그렇기에 아기가 백일동안 건강하게 잘 자라 준것에 감사와 축복의 의미를 담아 백일잔치를 했다.

또한 아기가 태어나 365일이 지나면 첫돌이 되었다하여 돌잔치를 하고, 비로소 호적에 작명을 하여 올리고, 그제서야 출생신고를 관공서에 했던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서 첫 일년만은 종말적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도 살아있구나. 장하다라고 생각하며 삶과 죽음의 나날을 365번 지나도 살아 있구나!' 산 사람의 반열에 세워주었던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공(共)이 그러하듯 홀연히 끝점을 맞는 것이 생명이다. 식물세계나 동물의 세계나 광물의 세계나 인간사가 다 그러하다. 시험비행을 하던 헬리콥터가 추락해 아까운 생명이 희생을 당했다. 예상이나 했겠는가?

병원마다 장례식장이 있다. 병원은 병을 고치는 곳이지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곳이 아니다. 결국 의사 위에 장의사가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지 못하나 장의사는 죽은 자를 완벽하게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마치 생명체를 낳고 기르는 것과 같다. 사실을 찾고, 그 사실을 보도하고, 보도된 사실이 인류 증진과 행복에 기여하여 유익한 결과 열매를 맺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사실’이란, 삶 그 자체이다. ‘사실’은 순간순간마다 태어난다.

태어나는 사실을 ‘보도’라는 강보에서 길러서 인격적 소통이 가능하도록 성숙시켜서 만천하에 내어 놓는다. 현대는 언론사의 사실보도 점하나까지 세계인의 눈과 귀 앞에 드려진다. 결국 세계인류가 공유하는 정보매체는 사실이 작든 크든 보도의 영역이 넓든 좁든 그 영향을 인류의 삶의 질에 기여함은 틀림이 없다. 전제주의 사회에서 집권자에게 진실한 사실을 직고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했다.

성서 잠언 서에는 왕에게 직언하는 것을 삼가라고 훈계하기도 한다. 집권자의 뜻에 불합리한 직고(直告)는 집권자의 집권에 반(反)하는 행위로 역적으로 정죄(定罪) 받아 생명을 내어 놓아야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개인주의 사회이다. 모두가 왕이다.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왕이다.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즉각 단절시켜 버린다. 이걸 정보라고 제공하느냐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외면당하고 만다. 이러한 사형을 매일 매일 당하면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전해야 하는 소명은 종말적 의식으로만 가능하다.

즉 매일 매일 죽는 행위가 사실 전달자의 운명인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정보의 바다라고 한다. 바다 안에는 사람에게 유익한 것도 많고 해치는 것도 많다. 정보선택자의 선택에 따라 자신에게 유익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해로운 정보를 얻기도 한다. 결국 정보의 바다에 정보를 생산하여 투입하는 작업이야말로 예술적인 미학과 표현의 문학적 지식과 배급의 경영의 천재성이 없이는 언론 사업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매사가 그러하듯 수익 없이 이러한 사명을 할 수가 있을까? 특히 지역사회의 공동체에 공공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행해지는 지역 언론의 사명수행이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익 얻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영의 세 가지 요소 중에 자본이 없으면 엔지니어도, 경영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문 한 호, 한 호가 발행될 때마다 언론 사명자의 자기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만이 가능하다.

매일 매일이 신생아를 탄생시키는 삶을 사는 것이 언론 사명자인 것이다. 독자는 종이 위에 새겨진 글씨로 정보를 접할 수 있지만, 사명자는 땀과 그리고 혼을 경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피가 마르는 자기 모두를 투신해야 한다.

한 주, 한 주마다 발행하여 배달이 끝나면 다음 신문을 어떻게 발간할 수 있을까? 예측불허의 작업이 또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29돌을 맞았다. 생과 사가 예측되지 않는 투혼의 사명수행이 오늘에 이르게 한 것이다. 늘 죽고, 늘 사는 반복이 29주년을 맞은 사명자에게 돌이 스물아홉 번 맞게 됨이 경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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