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부천신문] 사람들의 말씀이 가득한 공간은 많이 있지만 정보사회(情報社會)에서는 인터넷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자기 뜻을 마음껏 펼쳐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혼자서 방송도 한다. 시골 독가촌에서도 말씀의 마다에 마음껏 헤엄을 치고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의사표현이, 혹은 전달한 말이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일어나는가 하는데 유독 관심이 있는 듯 한 것은 소위 댓글 달리는 것에 일희일비하는 것 같다.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국가적인 보도기관들이나 어떠한 언론매체의 기사로 전달되는 것보다 자신의 글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SNS계정을 통해 공개하고 있다.
마치 대통령이 지나치게 언론을 배제하고 불신임하여 공중사설을 게재하기도 하는 사태를 보며 이젠 자신의 삶과 뜻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인식하고 SNS를 가장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의 생각과 편집에 의한 전달되는 것 보다는 효율적으로 자신의 뜻을 바르게 펼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언론사의 사건보도를 보면 그렇게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기자의 시각, 그리고 언론사의 보도 경향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견해 차이가 큰 경우가 많다. 기자의 시각에 따라 사건 자체가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도되는 것을 볼 때도 있다. 

이러한 연고로 우리나라의 종편 방송의 시청률이 한 자리수로 낙하하는 것을 보면, 대중들의 판단은 종편도 기자가 사실을 해석하여 자기 관점으로 편집하고, 언론사의 보도경향에 의해 연출하듯 보도하는 기사를 보느니 사건 당사자가 자기가 경험한 바를 솔직히 SNS라든지 온라인에 올리므로 말미암아 주관적이라고 하더라도 사건 당사자들의 글이니 그래도 신선하고, 진실하고,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뜻을 댓글로 반응하는 정보바다의 나눔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방송의 기획보다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취재 대상과는 상관없이 방송사나 언론사가 보도하고자 하는 의도대로 카메라 앵글을 맞추고 인터뷰를 수시간하여도 방송되는 것은 일분도 안될 수도 있다. 
보도 분량을 연출자의 의도대로 편집하여 보도하기 때문에 PD의 의도대로 연출되어 보도하는 기업은 파산하기도 하고, 가혹한 몰락을 당하는 기업과 공동체, 단체, 종교도 많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보자의 제보가 보도하려는 의도와 일치가 되면 사실과는 상관이 없다. 참조하면 되는 것이다. 
마치 극영화(劇映畵)처럼 방영해 버린다. 목적은 시청률이고 시청률은 광고비와 상관이 있고, PD와 그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개인에게도 대단한 유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요청하고, 요구하는 저변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대가가 따른다. 

예를 들면 A라는 종교와 B라는 종교가 경쟁체제였다. 
A라는 회사와 B라는 회사가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이 때, A라는 종교는 선한 사건을 보도하고, B라는 종교는 극악하게 보도해버리면 한 종교는 막대한 피해를 보고 기업은 아예 폐문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개인인 경우 인격이 전 세계적으로 모멸을 당하고, 명예는 반사회적 존재로 낙인찍히고, 그 가족과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을 매장하는 행위를 보편적 일과처럼 진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편파적 보도를 아는 사람들은 점점 이러한 언론의 특별한 프로그램을 외면하고, 뉴스를 불신하고 있음을 여론조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보도는 인류의 눈과 귀와 두뇌와 같다. 판단의 길라잡이다. 

그런데 마치 독자나 대중을 길 아닌 길로 이끌어가고 원인 없이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고, 서로 이간질시키는 일은 반사회적 행위이다. 
북한에는 인민재판이 있다고 한다. 도시에서, 지역사회에서 공개비판하고, 즉석 처형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언론이나 매체를 통해 보도되지 않으면 묻힌 사건이다. 그러나 언론이 한 인격이나 공동체나 단체를 지면내지는 스크린이나 인터넷에 보도해버리면 전 인류가 함께 돌을 던지는 전 인류 앞에 인민재판을 받게 되고 처형되는 것이다.
사람의 말씀이 진실하고, 정직할 때, 사람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괴물의 포효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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