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사

과거 농경사회에 대가족이 함께 살던 삶을 현대인들은 ‘원시적 삶의 행태’ 쯤으로 보고 있다. 

한 방에서 땔감(에너지)을 절약하기 위해서 열 식구가 함께 잠을 잤다고 말하면 강아지 우리나, 토끼우리, 즉 가축사육장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 부딪힘, 간접적 스킨십, 한 상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하며 더불어 함께 같은 일을 하므로 서로 유기적(생명적) 관계를 이루고 살았다. 

삼촌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고, 사촌의 위협이 나의 위협이 되며, 오촌 아저씨의 실수는 나의 실수가 되었고, 칠촌 숙모의 아기 생산은 나의 기쁨이 되었으며, 구촌 조카의 출세는 온 가정의 힘이 되었다. 

그래서 열 형제 중에 장자만 중학교 진학을 시키고, 나머지는 국졸(초등학교졸업)로 마감하여도 어느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이는 큰 형님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서로의 책임의 공유로 형제가 도움을 주고 살았고, 유산도 제사를 책임지는 장자에게 반을 주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장손은 부모님의 노후도 책임을 지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대가족 하에서 복지는 스스로 해결이 되었다. 노인 문제는 가족 중 젊은이들이 책임을 졌고, 어린아이 양육은 어른들이 책임을 지는 상부상조가 생명공동체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국가가 자녀 생산, 노인복지 및 노동, 주택까지 책임질 일도 없었고, 오히려 국가를 위해서 경제 규모가 작은 시대이긴 하지만 가정과 가족이 최선을 다하여 애국하고 헌신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들이 그 대표적인 예로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위해 공헌했다.

대가족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흙과 같이 살았다. 햇빛이 비치고, 물만 공급되면 씨가 뿌려지고,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내는 토양(흙)과 닮은 사람들이기에 생명이 태어나게 하고, 키우는 공동체, 그리고 인격들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변천은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와 사람들로 바뀌게 하였다. 현재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세 사람 중에 홀로 사는 사람이 한 사람인 것을 보면 이젠 개체적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회는 미디어가 개인의식 구조를 지배하기 마련이고 개체주의 사회로 변화하는데 기여한 가장 큰 영향도 미디어였다. 앉으나 서나 보고 듣고 하는 미디어에 중독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사회는 미디어를 장악하는 사람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미디어가 보는 시각에 따라 사실 전달 정보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듣고, 보고를 반복하다 보면 길들여진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미디어가 의도하는 인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다. 

‘둘만 낳아 잘 키우자’라고 계속 인식시켰다. 그로 인하여 둘만 낳아 잘 키우기 시작했다. 소위 산아제한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하나 낳아 잘 키우자’라고 인식시켰다. 하나만 낳았다. 산업사회에서는 부부가 모두 직장을 나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녀 각자가 자립하여 홀로 살 수 있는 능력자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굳이 가정이란 거추장스러운 조직 안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다. 자기의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편하다는 의식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대가족 하에서는 공유와 협력, 그리고 화목과 평안을 최고의 행복가치로 알았다. 개인주의에서는 편함, 주체적 삶, 자기 자신의 사회적 기능의 성취감 등이 행복 가치가 되었다. 

이러한 인성의 사람들이 명절이라는 절기를 맞는다. 다시 대가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얼마나 고생이 많겠는가? 며느리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사촌과 오촌이 무슨 정이 있으며, 삼촌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들을 위해 상을 차리고, 대접을 한다는 것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강제 노동이 되는 것이다. 개인주의로 의식의 변화된 사람들에게 공유, 배려, 화평, 섬김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임을 자신들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명절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부가 갈등하고 이혼하는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명절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식의 사람들에게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기를 바라는 국가적 정책은 시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소치이다. 

아무리 많은 예산을 투자해도 생산을 높이지 못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점차 인식되는 상황에서 자녀 생산과 양육을 여성에게 부탁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흙이 변하여 모래가 되었다. 

모래는 개체적으로는 빛나지만 생명을 잉태하거나 자라게 하지 못한다. 썩지 않기 때문이다. 흙은 썩을 줄 안다. 그래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양육하는 힘이 자기희생에서 일구어낸다. 모든 국가정책은 사안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방향을 정해야 한다. 

모래는 시멘트를 부으면 돌(石)이 된다. 개체화 다음에는 집단화만 이루어질 뿐이다. 선전과 선동하는 자들에게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어느 날인가 개인주의 사회는 자아정체의식이나 주체의식도 상실한 체 집단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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