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 사

[부천신문] 고대 로마의 사람들은 로마가 약한 상대국을 정복하고, 그들의 식민지를 만든 다음 평정 이후의 정국을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불렀다. 

이를 로만 팍스라고 했다. 강자가 약자를 물리적으로 압제하므로 약소국은 강대국에 종속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 평화란, 강대국의 입장에서의 정의일 뿐 억압받는 약소국은 전혀 정의가 아니다. 

착취를 당하고, 인권을 잃어버리고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살았으나 죽은 자요, 상대적으로는 사람과 동물관계이다. 영혼과 정신적으로는 짐승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평화의 계념이 일부인간들에게는 지금도 지켜오고 있었다. 

부족과 부족사이, 이러한 강자 위주의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이 계속되는 미개한 사람들이 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비인간적 만행만 낳을 뿐이다. 

기에서 진일보한 평화가 전쟁과 갈등을 멈추고, 서로 약속을 하고 평화의 조약을 체결한다. 이러한 평화조약 체결은 힘의 균등이 이루어졌을 때, 혹은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되었을 때, 너무 오랜 전쟁 끝에 구성원들의 전의를 상실할 때이다. 혹은 서로가 요구하는 조건이 성립될 때, 전략적으로 맺은 평화조약이다. 대표적으로는 독일의 나치와 영국의 조약이 옛 러시아와 독일간의 평화협정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략들이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평화가 있다. 이것은 지극히 이상적이면서 종교적 평화계념이다. 조건 없는 용서와 화해를 의미하며, 한 발 더 나아가서 강자가 약자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사랑에 근거한 평화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인간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므로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간(아담)은 죽음의 저주와 고통의 날이 닥쳐왔다. 인간사란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모색하였다. 누군가가 화해를 하자면 죄의 값을 치러야 하고,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길을 모색한 끝에 자기 자신(神)이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하였고, 그를 예수라 한다. 예수는 삼년간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신만이 할 수 있는 많은 기적을 베풀고, 신의 아들로 믿도록 하였다. 

그 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을 선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겠노라고 선언한 다음 십자가에 서 무참히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하던 마음이 긍휼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긍휼이란(사랑받지 못할 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자는 하나님과 생명을 나누는 영생(永生)을 얻는다는 은혜를 주었다.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관계가 이룩되었다.
 
나아가서 인간과 온갖 피조물 사이에도 탐욕스러운 인간을 두려워하여 갈등과 불화한 관계가 평화 공존의 세계로 발전하게 될 상태를 평화라고 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평화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다. 희생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용서가 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평화를 위해서 희생당한 자에게는 보상이 있다. 부활이다. 

예수가 죽은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엄연한 사실을 믿고, 소망하며 십자가에 스스로 기쁨으로 올라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이것을 신앙으로 생각하고, 모인 사람들의 종교가 기독교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만 팍스든, 상호 조약으로 만들어지는 평화이던, 기독교 평화이던, 평화를 만들자면 타자의 생명이든 자신들의 생명이든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평화는 수단이다. 평화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촌에 더불어 살면서 공생 공영하는 이유는 더불어 생명들이 살기 위함이다. 이러므로 전쟁이란 생명을 상실하는 가장 비인간적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인류 생성 이래 크고 작은 전쟁이 없는 날이 없었다. 

보다 더 자신들의 생명이 번성하고 용이하게 살기 위한 전쟁이었다. 자신들의 생명이나 상대국의 생명이나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평화를 만들 이유도 없고, 평화의 조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돌아간다. 

생명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지 아니하는 집단이나 부족이나 공동체나 국가는 평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 자신의 지도체제에 동의하지 아니하면 구금, 강제 노동, 심지어는 공개처형, 수십만의 정치범을 강제 격리하는 집단은 평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 

적어도 평화를 만들려면 스스로 서로 생명과 인권을 존중히 여기고, 서로가 서로와의 공평과 평화를 만들어내는 집단이어야 상대국과의 평화를 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서로가 경계했던 경계를 풀고, 서로가 감시하던 감시를 푼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집권자의 영혼과 자기 성찰과 개조 없이는 모든 ‘평화’란 포장된 위장이다. 

체제를 보상해 달라는 요구는 자신은 변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다. 위장된 평화를 위해 세계를 누비는 평화의 사도의 수고가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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