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대 영 목 사

[부천신문] 신앙은 주관적이다. 신약성서에 사도행전이라는 책이 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타인들과 더불어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예수를 만난 사람은 바울 한 사람 뿐이다. 

신(神)체험이란,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지 더불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물론 사도행전에는 집단으로 성령을 경험하는 신(神)체험 사건도 있다. 

그러나 샤머니즘에서의 신내림이라든지 불교의 득도의 경지체험은 개인적이리라. 이 주관적 체험을 통하여 신앙에 심취해가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의 교리학습을 통하여 이루어진 신앙이 많다. 신체험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심에 대해서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성서의 문장이란, 문장 그대로 믿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그 문장의 의미만 받아드릴 문장이 있고, 그 문장이 상징하는 상징성만 이해해야 할 다양한 문장이 성서에는 편집되어 있다.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예수가 승천 후에 다시 세상에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예수의 재림은 공중 재림으로 기록되어 있고, 모든 사람이 공중에 올려 올라가 예수 앞에서 일생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다. 

심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영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특이한 기독교 집단이 있다. 예수가 이미 이 세상에 다시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는 곳을 왕국이라고 말한다. 

왕국이란, 오신 예수가 통치하고 있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들의 교리에는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원수도 이웃으로 고백한다. 

또한 원수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하며, 가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총을 잡는 것은 살해 행위가 되므로 총을 들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집총거부의 교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는 자신이 소속된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하고, 애국하는 것을 이웃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의 3.1 독립운동에 기독교가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한국에 파송된 외국의 선교사들이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식민지화를 세계에 알리면서 한국의 독립을 도운 선교사도 적지않다. 

종교와 나라는 분명히 구분이 된다. 종교는 정신적이면서 영적인 것이다. 나라는 육적이고, 가견적이다. 그러므로 완연히 구분이 되지만 삶의 자리는 동일하다. 한반도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기독교, 불교, 유교 및 여러 종교가 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다. 나라는 국토와 국민과 주권이 요소이기에 한 나라의 국민이란, 한 주권에 속하여 있고, 한 국토에 살고 있으며, 보편적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나라가 외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면 공동 방어해야 하고,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함께 협력하여 이루어야 보다 나은 삶의 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학습한 자기 종교의 교리를 내세워 ‘양심’이라고 말한다면, 양심이라는 말의 정의가 객관적 해석되었다고 볼 수 없다. 보편타당한 양심이어야 양심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야심이 아닐까? 

국가가 전 국민의 노력으로 건설한 도로와 수도와 전기와 건강 보험이든지, 사회간접 시설은 다 누리면서 유독 적군이 쳐들어오면 싸움은 하지 않겠다. 총은 들지 않겠다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자신의 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있지 않는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리성, 집총거부일 뿐이지 인간의 보편타당한 양심을 인용하여 양심에 의한 집총거부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 들임이 마땅할까? 

끝까지 집요하게 집총거부를 한다면 군입대는 시키고, 군부대의 병과는 다양하다. 공병이나 의무병이나 취사병 같은 이러한 특별한 직군을 부여하고 모든 국민과 함께 해야 할 병역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국방의 의무의 존엄이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집총거부의 이유로 군입대를 거부한 자들에게 양심수라고 분류하는 것부터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수한 소수 종교집단의 교리를 신봉하는 것을 보편타당한 양심으로 보는 것은 오해가 아닐까? 

한 국가가 평안하자면 특별한 계층을 축소하고, 공평하고, 동등한 의무와 책임과 권리가 주어질 때, 평안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권력상 특권 계층이 있고, 경제적으로 지나친 빈부격차가 없으며, 도덕적으로 지나친 이질적인 도덕행위가 없이 편히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나라가 평안한 나라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는 바야흐로 개인주의가 더욱 깊이 뿌리박고 있고, 확장되어 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자신의 철학이나 이념들이 생겨날 수도 있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주관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양심’이라고 규명해 간다면 국민 대다수의 보편타당한 양심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적 양심의 본질은 자기 종교의 교리로 인식된 인식을 양심이라 주장하지 않고, 신앙이라 하고 타종교나 국민의 대다수의 보편적 양심을 존중할 줄 아는 종교인의 양심이 종교적 양심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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